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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복음]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마태오1 2012. 6. 22. 07:24

 

 

 

 

예수님과 니고데모

 

요3:1-21


어떤 사람이 ‘영원’이라는 단어를 설명하기를, 태평양 한가운데 풀 한포기 나지 않은, 바위로만 된 높다란 섬이 하나 있는데, 1천년마다 물새 한 마리가 날아와서 그 바위에 자기의 무디어진 부리를 갈아서, 그 바위섬이 다 닳아 없어질 정도의 긴 시간이라고 해도, 그것 역시 영원의 한 점에 불과 하다고 한다.

스스로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께서 유한한 이 세계속에 살고 있는 나와 우리모두를 다시 영원한 세계로 이끄시기 위해 은혜의 계획을 세우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물질세계로 창조하셨고 우리는 이 물질 세계를 통해 영원한 세계를 소망하고 꿈꾸게 하셨다.

그런데 이 물질세계는 유한하다.

이 물질세계는 자연이나 시간, 공간뿐 아니라 온도 따위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여 나타나기도 사라지기도 한다.

바로 삶의 탄생과 죽음이다.

이것은 비단 호흡하며 숨쉬는 생명체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만들어진 모든 물질세계는 입이 없어도 눈이 없어도 손과발이 없어도 그 자신의 원소에 의해서 자연과 조화하며 나타나기도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기도 한다.

 

우리는 바다를 보고 이것을 이해해 보기로 하자

바다는 생명체가 아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온도의 변화에 의해 수증기가 위로 올려가서 흰구름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는 발도 없이  기압의 대기층에 따라 무거운 구름은 아래로 가벼운 구름은 위로 나뉘어 진다.

그리고는 정처없이 다니다가 어느순간 다시금 그 구름은 비로 눈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을 표출한다.

구성원소는 H2O 비록 구름은 생명체는 아니지만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적절하게 자신을 변화시키면서 때로는 땅속으로 때로는 바다로 때로는 하늘로 마음껏 돌아다닌다.

 

그렇다.

우리가 아는 생명의 존재는 우리시각에서만 발견되어진 한계적 존재일 뿐이다.

우리는 이 지구가 생명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냥 여러원소가 뒤섞여진 하나의 돌덩이리다.

그런데도 이 지구는 마치 어떤 법칙에 의해서 태양주위를 정확하게 돈다.

지구자신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자전한다.

우리지구를 둘러싼 한은하계에는 약 천억개의 별이 있다고 한다.

이 천억계의 별들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약속이나 한 듯이 돌고 있다.

절대로 다른 방향으로 돌지 않는다.

 

그런데 한 은하계에 약 천억개의 별이 있는데 이러한 은하들이 또 약 천억개 이상이라고 한다.

그 수많은 별들이 모두 시계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돌면서 때로는 은하들끼리 서로 겹쳐지기도 하여 또다른 새로운 은하를 만들기도 하고 오래된 별들은 사라지기도 하지만 대 우주의 법칙에 잘 순응하면서 우주가 살아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대 우주는 무생물이면서 그 자체가 하나의 생명체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영원이라고 표현한다면 이 천억개의 은하가 모여있는 우주에 인간이 발로 걸어서 한바퀴 도는 만큼의 넓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듯 싶다.

 

하지만 그 영원도 하나님 시점에서는 한 점에 불과하다.

말 그대로 영원은 영원이다.

이는 마치 원을 그려놓고 원위에 자동차 바퀴를 굴려 결승점을 찾는것과 같다.

무엇을 말하기 위해 이처럼 장황한 설명을 하고 있겠는가?

 

우리의 신앙이 어떤 문제와 도전을 받고 있는가 하면, 아직까지 우리는 세상에서 벗어 나본적이 없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영광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은 항상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어떤 물질세계에 대부분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어떤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과 지옥을 체험하여 나름대로 간증을 하며 증거하는데 하나님 나라를 황금, 정금, 다이아 몬드로 표현하기도 하고 수정과 같은 물로 표현도 하고 열두가지 과일로 표현하는데 이는 세상의 언어로는 도무지 표현 할 길이 없어서 세상에서 가장귀한 것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표현해 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어느것도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한 일부분일 뿐이다.

이제 우리가 이 세계를 알기위해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상의 방식을 가차없이 무너뜨리지 아니하면 우리는 이 세계를 전혀 경험할 수가 없게 된다.

 

이 시간을 통해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여러분속에 새로 지으시려고 하는 신비한 영적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면, 그래서 새로운 어떤 영적인 세계를 볼수 있는 눈이 띄어진다면, 여러분이 알고있는 지식이나 경험이 아무리 위대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은혜의 역사로 인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세계의 영원한 집이 우리마음속에 온전히 이루어 지기를 바라게 될것이다.

 

바리새인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었다.(요3;1)

이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이어서, 일반사람과는 달리 힘이있는 사람이었다.

 

바리새인이라 함은 그당시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는 유대교중 정통파였다.

그들은 경건하여 613가지나 되는 율법을 기리기 위해 옷에 구슬을 매달았다.

율법을 기록해서 집안곳곳에 붙여 외워서 지킬려는 노력하는 사람이었고

일주일에 두세번씩 금식하며 십일조를 철저히 지키며

백성을 구제하고 기도하는 실지로 훌륭한 그런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유대 종교적 지도자로 경건과 학식과 덕망을 갖춘자였다.

 

관원이라 함은 국가 유대 종교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의논하고 결정하는 힘이 있는자였다.

종교재판할때에 가,부 투표를 할수 있는 그런 힘이 있는 사람이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나 그 이상 되는 위치에 있다고 하겠다.

 

만약 우리들이라면 이런사람이 찾아왔을때 어떤 생각을 갖겠는가?

“야 이런 사람이 우리 교회에 오면 교회발전에 상당한 도움이 되겠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사람을 우리 교회 교인으로 만들어야지” 하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대다수의 개척교회 목사님들은 사람하나 아쉬운 형편에 이런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이 인생문제로 찾아온다면 평소때와는 달리 모든 힘을 기울여 전도하리라 생각한다.

 

만약 여러분의 교회에 장관이나 시장이 등록 한다고 치자 그때부터 교회입지가 달라질것이다.

도로가 좁으면 도록 확장 공사를 할것이고 그분을 등에 업고 도움을 얻기 위해 또한 많은 사람들이 왕래할것이다.

 

만약 옆에 중.고등학교 교장이 등록했다면 그 학교학생들의 전도는 다 해놓은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이처럼 우리는 어떤 힘과 능력을 가진자가 우리 주위에 있는가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중심으로 교회가 눈에 보일정도로 내부든 외부든 많이 물질적으로 변하여 짐을 많이 보고 자라왔다.

 

그런데 이사람 니고데모는 낮에도 아니고 밤중에 주님께 찾아왔다.(요3;2)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남의 눈을 피해 아무도 없는 밤중에 홀로 예수님을 비밀히 만나러 왔다는 것이다.

 

자신은 지금 현재 유대인의 관원으로서 신분이 높은 자이고 바리새인으로서 종교지도자였기 때문에 감히 남앞에 신분을 드러낼 정도로 예수님께 나아와 공개적으로 상담하기에는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왜그런가?

그당시 예수님은 제사장을 위시하여 사두개파나 바리새파와 같은 유대종파 사람들에게는 인정받지 못했다.

 그이유는 예수님이 공공연히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며 모독죄를 범하고 율법의 기준을 재해석하여 지키고 따르는 행위보다는 속중심의 마음의 세계를 다룸으로서 종교적 생활방식에 혼돈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었다.(마5장-7장)

 

그렇기 때문에 니고데모는 신앙적으로 해결받지 못한 마음의 갈급함은 있지만 예수님을 만난것이 이들에게 알려지면 자칫 지금껏 누려온 그 위치에 불이익을 당할까 염려가 되어 남의 눈을 피해 밤중에 찾아온것이다.

 

우리중에도 이러한 사람이 많이 있다.

 

적어도 자신의 인생을 책임질만한 불혹의 나이가 되어 사회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있는 자라면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알아주는 위치이기 때문에 인생의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남이 어떻게 생각할까 두려운 나머지 쉽게 자신의 인생의 고통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러다가 마음의 고통이 심해지면 해결받기 위해 아무도 몰래 안정적인 치료를 위해 용하다는 사람을 찾아가는데 간다는 곳이 점쟁이나 철학가나 심지어 정신과의사등을 만나 자신의 신분을 숨긴채 비밀리에 해결되어지기 위해 찾아가는 것과 같은것이다.

 

그리고 신앙을 가진사람들이라면 신앙문제든 인생문제든 개인문제든 죄의 고통으로 고민하다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나 교역자들에게는 정죄를 당할까 도저히 부끄러워 말도 못하고는 아무도 몰래 신통하다는 목사님을 찾거나 다른 사이비 교단같은데 심취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니고데모 그역시 유대인의 관원이고 경건한 바리새인이었지만 마음에서 일어나는 신앙적 갈등과 고민을 자신의 체면을 버리고 예수님께 나아가 예수님에 대하여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이야기 한다.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

 

보라 지금 경건과 학식과 덕망을 갖춘 종교지도자인 니고데모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예수님을 싫어하고 모함하려고 하는 바리새인중의 한명인 이 니고데모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이 니고데모가 밤중에 왔다는 것은 남의 이목도 이목 이거니와 오랜 시간에 걸쳐 마음의 고통으로 고민한 끝에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던 것이다.

 

율법에 정통한 그였고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증거하고 이끌어 가야 할 책임이 있는 자가 바로 니고데모였다.

 

그런 그가 밤중에 나아와 예수님께 자기 중심의 깊이 느끼는 옳은 생각을 체면도 무릅쓰고 겸손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왜 왔을까?

왜 예수님앞에 나아왔다고 생각하는가?

성경은 니고데모가 왜 무슨 이유로 왔는지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지 않지만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서 온 이유를 가르쳐 주고 있다.

 

그는 그 마음에는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보기를 소망했다.(요3;3)

그것은 지금까지 율법을 통해 지상에 세워진 성전과 성소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막연하게 그려왔다.

 

그러나 그러한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성전과 성소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가득히 채우고자 하는 마음의 소원을 채울 수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늘위의 성소가 땅위의 성소로 율법을 통해 알고 외웠던 그였지만 그는 항상 그 마음에 하나님을 채우고자 하는 진리의 목마름에 시달렸던 것이었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유대인의 관원으로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으로 종교적인물로 남에게 존경받고 살아온 위치지만 정작 그는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육신에 있는 불쌍한 자였던 것이다.


겉으로는 너그럽고 인자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하게 살고자 하는 종교지도자 였지만 실상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영원한 하나님의 세계에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는 그런 자였다.


이런 그의 모습에 어느누구라도 “네 그렇습니까? 당신의 성품을 보아하니 참 너그러우신 분인 것 같은데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습니다.” 라고 알려 주고 싶을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주님은 두 번씩이나 진실로 진실로를 외쳤다.

이것은 분명히 절대로 결단코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지금 니고데모인 네가 모든 사람에게 존경과 인정을 받고 사는 위대한 사람이지만 하나님 나라에 가기를 원한다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잘라 말하고 있는것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차원으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뜻이다.

이말은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것도 아니요 니고데모처럼 어머니 배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것도 아니다.(요5:4)

 

우리는 배추 벌레와 같은자이다. 

배추벌레는 무엇인가?

 

어떤 벌레가 알에서 깨어나 보니 어느 배추 잎사귀에 붙어사는 배추벌레가 되어 있었다.

배추벌레로 있을때는 남의 배추 밭에 들어가 배추를 뜯어먹고 사는 징그러운 벌레였다.

 

어느날 그 배추벌레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어 날게 되어진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전에는 배추를 상하게 하고 피해를 입히는 땅을 기어다니는 징그러운 벌레였다.

 

하지만 나비가 되었을때는  그는 마음껏 하늘을 날수 있으며 먹는 음식도 시퍼런 잎사귀에 시금 털털한 잎사귀만 먹고 살다가 향기로운 꽃에서 꿀만 먹고 사는 삶으로 바뀌고 더럽고 징그러운 모습에서 예쁜 모습으로 사람에게 사랑받고 살아간다.

 

배추벌레로 있을때는 한치앞도 볼수 없는 땅에다 목적을 두고 살았지만 나비가 되었을때는 훨훨날아 자신의 삶의 목적을 먼곳에다 두고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거듭남이다.

 

하나의 생명체이지만 거듭나게 될 때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어 지게 되는것이다.

필요없고 무가치한 육체의 허물을 벗게 되었을때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게 거듭남이다.

 

무익한 배추벌레에서 사랑받는 나비가 되듯이 인간은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사단의 자녀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탈바꿈되는 것이다.

 

이 인간은 어떻게 거듭날 수 있나?

내 육신의 더럽고 추악한 것을 알아서 내게 있어봤자 무익하고 아무 소용없는 것임을 알아서 전부 허물을 벗듯 버리게 될 때 거듭날 수 있다. 

 

수고하고 얻기 위해 땅만 바라보고 사는 배추벌레와 같은 인생의 모습에서 이렇게 살다가 난 사단의 발에 밟혀 죽을 인생이구나 하는 것을 알아 내 육신을 벗겨내고(자기를 부정)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로 날개짓 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거듭난 모습이다.

 

그렇다. 원래부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은 무익한 배추벌레가 나비가 되고 물속의 애벌레가 잠자리가 되고 굼벵이가 매미가 되듯이 더러운 죄인은 거룩한 의인이 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노력해서 의인이 되는게 아니라 먼저 내가 땅을 기어다니는 배추벌레처럼 얼마나 무익하고 형편없는 존재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럴 때 주님은 사람이 나비처럼 바뀌어 질수 있도록 주님의 의의 날개옷을 입혀주어 하늘을 훨훨 날아다닐 수 있도록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것이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롬8:1-2)


이 거듭남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의 더러운 의의 옷을  버려야 한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같은 사실이 이루어질때 자연스레 나의 더러운 허물을 벗게되어 저주받은 죄의 땅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원한 하늘세계를 맛보게 되는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배추벌레와 같은 징그럽고 피해만 입히는 아담의 피를 흘려받은자로서 죄인이 될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나를 위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되어진 그 사실을 깨닫게 해서 영적세계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으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듣고 깨달으면 거듭난 자가 되어 거룩한 의인으로서 기쁘게 살아간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이와같은 세계를 경험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도 없었다.

그 이유는 바로 율법에 매여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경건하고 아무리 하나님을 잘 섬기고 아무리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 모습이라 할지라도 그는 배추벌레와 같이 육신에 있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거듭난다는 말을 전혀 이해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니고데모가 이런말을 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 나올수 있나이까?”(요3:4)

 

세상에서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달달달 외우는 바리새인이라 할지라도 영적으로 어두운 사람은 다 이렇게 어리섞은 소리를 한다.

 

이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말씀을 지금 다시금 태어나야 한다는 뜻으로 알고 있고 그렇다면 모태의 뱃속에 다시 가야하는가를 생각하고 있다.

 

물론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러나 주님안에서 태어나는 과정이 우리 육신의 잉태하는것과는 전혀 다르다.

 

 

니고데모 그는 분명히 진리를 알기위해 몸부림 치는 자였고 그 영원한 하나님의 세계를 알기위해 다른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영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자였다.

 

하지만 가르쳐 주지 않으니 그는 나이가 들어 종교지도자가 되어도 늘 하나님의 저주와 멸망의 심판아래 놓인자가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3:5-8)


물과 성령으로 난다고 하였다.

물은 무엇인가?

모든 생명체의 공급원이다.

그렇지만 노아의 홍수로 통해 보여지듯이 모든 생명체를 수장시켜 죽이는 역할도 한다.

 

애굽에서 탈출할 때 하나님의 역사로 홍해바다가 갈라졌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바다사이를 건너갈 때 그 주위는 금방이라도 집어 삼킬듯한 태세로 물이 넘실댄다.

그러나 애굽군사들이 그 홍해 사이를 건너갈때는 바로 그들을 수장시켜 죽여 버렸다.

 

그렇다. 물은 죽음을 통과하는 하나님의 영적인 법칙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일원이 되기위해 물세례를 받을때 내 더러운 육신이 물에 수장되었음을 하나님께 알리는 예식을 행하게 된다. 

 

 

성령은 무엇인가?

기름부음이다.

또한 새 생명의 신호탄이다.

물로 인해 수장되어진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를 내 세울수 없고 내 생각을 주장 할 수 없다.

우리는 이때 완전히 죽은자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이다.

그러나 성령은 이러한 우리의가 죽어진 자에게 오셔서 우리를 이끌어 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이끄심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자는 절대로 내가 사는게 아니다.

나는 이미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죽었다.

그런 나를 성령께서 오셔서 나를 주님의 은혜아래 살아갈 수 있도록 나를 하나하나 이끌어 주시는 것이다.

 

만에 하나 내가 주안에서 죽은 자임을 알고도 계속해서 자기 생각 자기의를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살아 있는 사람이 되어 성령의 이끄심을 받지 못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믿음의 사람도 아니요 성령의 사람도 아니다.


성령의 충만이라는 것은 내가 무슨 특별은사를 받아 예언하고 병고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주님의 이끌림을 받을때 따라오는 부수적인 것들이다.

 

성령의 충만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렇듯 물로 인해 죽어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성령의 이끌림에 의해 살지 못하는 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분명히 잘라 말하는 것이다.


그 예로 예수님께서는 바람을 예로 들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바람을 잡을 수는 없다.

 

그처럼 성령도 육이 아니라 영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은 성령의 역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그 이끄심을 받아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육적인 사람은 그것을 한날 기이한 기적이나 이적쯤으로 여길뿐이지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 영적길잡이인 것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오늘날 모든 육적인 사람들은 삶의 진리를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에 기초를 둔다.

그래서 그것이 아니면 모두 의심하고 떠나버린다.

 

하지만 영적인 사람들은 보이는것에 마음을 두지 아니한다.

언젠가는 이 물질 세계는 모두 없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곳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은 그 소망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성령을 통해 우리를 한걸음 한걸음 이끌어 가게 하시는 것이다.


니고데모가 또 한 번 어리섞은 소리를 한다.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이로보건데 아직도 니고데모는 전혀 거듭남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 율법과 행위에 매인 사람들은 그 성품은 착하고 올바르게 살아갈지 몰라도  그들은 전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살아간다.

 

말씀대로만 그대로 행하면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그 마음은 어떤가?

그들은 자유와 감사와 기쁨이 없이 법에 매인 사람들로 어쩔수 없이 살아가게 된다.

 

만에 하나라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시편 내용처럼 "주님의 말씀은 내발에 등이요 내길에 빛이니이다." 하면서 겸손하게 낮추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고 주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진정한 율법주의 자이다.

 

그러나 이 세상 사는 사람들중 어느누군들 이와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는 자가 있을까?....

없다. 온전히 지키는 자는 아무도 없다.

 

온전히 지킨다는 것은 하나없이 모두 잘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말씀의 계명(율법)중에 하나라도 어기면 모두 범한자로 여겼기때문에 오히려 죄를 지었다는 사실만 깨닫게 되어 죄의 가지수만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도 율법으로는 의를 이루는 자가 아무도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지키는 자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죄인인것이다.

(약2:10-만일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자가 되나니.....)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지킬려고만 애썼다.

어쩔 수 없이 어기면 또다시 속죄제사를 드리고 또 지킬려고 애썼다.

 

이러한 세월이 수천년간 이어지다 보니 그들의 마음에 율법의 종(죄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진정한 마음을 잊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빨리 버려야 한다.

나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것에 대하여는 이래도 고통 저래도 고통이기에 이것을 빨리 버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안타깝게도 어길때 어기더라도 또다시 하나님 이번에 실수 했으니 다음번에 정말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라고 자기스스로 자기의지를 믿고 감히 하나님과 약속을 하는 추태를 보이는것이다.

 

이것이 왜 추태인지 아시는가?

약속은 힘있는자가 하는것이지 연약한자가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키질수 있는 힘이 있는자가 약속을 하지, 하루에도 우리마음이 수십번씩 변하는데 어떻게 인간의 그 약속을 하나님이 받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맹세하지말라고 했다 하늘로도 말라고 했던 것이다....... (마5:34-35)


니고데모는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서 살면 된다고 믿어왔던 사람이다.

그래도 마음에 참된 기쁨이 없으니 예수님께 찾아와서 이러한 자신의 모습에 또 무엇이 있어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갈수 있고 볼수 있는가를 물었던 것이다.

 

주님이 말하신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요3:10)

굉장히 모욕적인 말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를 들어 마치 이제 갓 개척교회를 시작한 목사가 장로교단의 총회의 임원되는 목사에게 하는 말인것이다.

(그이유는 그당시 니고데모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정통적바리새 교단의 실력자이고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지 1-2년도 되지못한 신출나기 선지자로서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당신은 총회 임원이 되는 목사이면서도 아직까지 이런 하나님 나라에 갈수 있는 거듭남의 은혜를 모른단 말이요”

 

얼마나 수치스러운 말인가?

아마 오늘날 같으면 이와 같은 말을 하는 신참 목사들을 총회 재판에 세워서 이단자라고 정죄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계속 말을 이어나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땅의 일이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이다.

가난한자, 병든자, 귀신들린자를 고치며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신 일이다.

 

이런 일을 너희가 보고도 나를 의심하고 하는데 어찌 내가 하늘일을 그대로 말한다고 해서 너희가 믿겠느냐 라는 뜻이다.


그리고는 이 니고데모를 통해 신구약의 중심이 될만한 말씀을 하셨는데 십자가의 죽으심과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전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십자가에 매달림)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4-15)

 

무슨말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도 때도 없이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불뱀에 물려 고열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가는 사람이 많았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의 응답으로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고는 누구든지 이 뱀을 보는 자는 산다고 하였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두가지로 나뉘었는데 어떤자는 “내가 무서운 불뱀에 물려 뱀소리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는데 또다시 사단의 화신이라고 하는 뱀을 쳐다보라고?” 해서 쳐다보지 않아 죽는 사람이 있었고

 

어떤자는 “이래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 것은 매한가지이니 사단의 화신인 흉측한 뱀이지만 모세의 말대로 보고나 죽자 해서 바라본자는 죽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처럼 가장 흉악한 범죄인들이 사형을 시키기 위해 세운 십자가의 형틀에 예수님을 매달아 놓고 누구든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면 영생을 얻는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예수님이 전하게 된것이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당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모든사람들이 싫어하는....가장 흉악한 죄인들만이 못박아 죽게되는 저주스러운 십자가 사형틀에서 죽음으로써 구원이 이루어짐을 성경곳곳에서 이야기 했을때 그들은 이건 아니다 라고 등을 돌리게 되는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하고는 정 반대로 우리가 이성적으로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모습으로 희생하셔서 우리의 구원과 영생을 이끌어 가게 되는것이다.


그리고는 주님께서는 모든 신구약성경의 중심이 될만한 말씀을 니고데모에게 하셨는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18)

 

하시면서 니고데모에게 주님자신이 바로 이와 같은 일을 이루실 자임을 비유의 예언을 통해 말씀하셨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네가 영생을 얻기를 원하고 하나님 나라를 보기를 원한다면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깨달아 자신이 죄인된 자임을 알아 우선적으로 거듭나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거듭남은 자신이 전적으로 악하고 무익한 것임을 알아 하나님앞에 회개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물과 성령으로 되어져야 하는데 이것은 자신이 이제 하나님앞에 물로 수장되어 죽은 존재임을 알리고 성령으로 이끌림을 받아야  영생을 얻어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될것임을 알려준다.

 

이와 같은 모든 일이 이루기 위해서는 바로 그가 영안의 눈이 밝아져 자신앞에 놓여진 의의 실체이신 독생자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입고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일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후 니고데모는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성경 여러곳에서 예수님을 위해 변호하고 죽임을 막기위해 애쓴 모습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성경학자들 사이에는 니고데모가 알려지지 않는 예수님의 추종자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요7:50-52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 에서 왔느냐 찾아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자신의 처한 형편때문에 주님을 믿고의지한다고 정확히 드러내지못하고 그렇다고 예수님의 말씀을 부인할수도 없는 니고데모의 모습...... 

 

*요12:42-43

-그러나 관리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오늘날에도 이러한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거듭나야 한다.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거듭나야 썩어 없어질 세상영광, 사람의 영광에 마음을 두지않고 하나니의 영광을 위해 자기의 전목숨을 내어놓고 진정한 믿음의 세계를 향해 나아갈수 있게 된다.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자..........

출처 : 예수그리스도 복음 선교회
글쓴이 : 산울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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