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네 명의 아내를 둔 남자가 있습니다.

마태오1 2009. 2. 4. 10:08

━┓
┃오┃늘도
┗━┛행복바구니에 많은 행복 담으세요

    네 명의 아내를 둔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첫째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나깨나 늘 곁에 두고 살아갑니다. 둘째는 아주 힘겹게 얻은 아내입니다. 사람들과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면서 쟁취한 아내이니 만큼 사랑 또한 극진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둘째는 든든하기 그지없는 성과도 같습니다. 셋째와 그는 특히 마음이 잘 맞아 늘 같이 어울려 다니며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넷째에게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녀는 늘 하녀 취급을 받았으며, 온갖 굳은 일을 도맡아 했지만 싫은 내색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그의 뜻에 순종하기만 합니다. 어느 때 그가 머나먼 나라로 떠나게 되어 첫째에게 같이 가자고 합니다. 그러나 첫째는 냉정히 거절합니다.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둘째에게 가자고 했지만 둘째 역시 거절합니다. 첫째도 안 따라가는데 자기가 왜 가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셋째에게 같이 가자고 합니다. 셋째는 말합니다. "성문 밖까지 배웅해 줄 수는 있지만
    같이 갈 수 없습니다." 라고 그는 넷째에게 같이 가자고 합니다. 넷째는 말합니다. "당신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가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넷째 부인만을 데리고 머나먼 나라로 떠나갑니다. <잡아함경>에 나오는 이 이야기의 "머나먼 나라"는 저승길을 말합니다. 그리고 "아내"들은 "살면서 아내처럼 버릴 수 없는 네 가지"를 비유하는 것입니다. 첫째 아내는 육체를 비유합니다. 육체가 곧 나라고 생각하며 함께 살아가지만 죽게 되면 우리는 이 육신을 데리고 갈 수 없습니다. 사람들과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면서 얻은 둘째 아내는 재물을 의미합니다. 든든하기가 성과 같았던 재물도 우리와 함께 가지 못합니다. 셋째 아내는 일가 친척, 친구들입니다. 마음이 맞아 늘 같이 어울려 다니던 이들도 문 밖까지는 따라와 주지만 끝까지 함께 가 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나를 잊어버릴 것이니까요. 넷째 아내는 바로 마음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은 별 관심도 보여주지 않고 궂은 일만 도맡아 하게 했지만 죽을 때 어디든 따라가겠다고 나서는 것은 마음뿐입니다. 어두운 땅속 밑이든 서방정토든 지옥의 끓는 불 속이던 마음이 앞장서서 나를 데리고 갈 것입니다. 살아 생전에 마음이 자주 다니던 길이 음습하고 추잡한 악행의 자갈길이었으면 늘 다니던 그 자갈길로 나를 데리고 갈 것이고요, 선과 덕을 쌓으며 걸어 다니던 밝고 환한 길이면 늘 다니던 그 환한 길로 나를 데리고 갈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 어떤 마음으로 어떤 업을 짓느냐가 죽고 난 뒤보다 더 중요한것 같습니다.
          우리들 삶의 밑 바탕에는 철저히 "욕망"이란 마음이 깔려 있습니다. 우리들의 행동 하나 하나마다 스스로 생각을 했던 하지 못했던 간에 "욕망"이란 놈이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자 함도 "욕망"이고, 보다 많이 돈을 벌고자 함도 "욕망"이며, 잘난 배우자를 선택하고자 하는 것도 "욕망"입니다. 명예와 권력을 얻고자 함도...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자 함도... 우리가 살아가며 느끼는 이 모든 행위마다 "욕망"이란 놈은 언제나 고개를 쳐들고 일거수 일투족 우리의 행위에 끼어들어 모든 판단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욕망"이 클수록 무언가를 얻고자 갈구하는 마음이 커지고 얻고자 함이 클수록 그에대한 집착도 커지며 집착이 클수록 괴로움도 커지는 것입니다. "욕망"이 작을수록 얻고자 함이 적어지고 집착을 여의게 되어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들 괴로움의 원천은 대부분 "욕망"에서 옵니다. 욕망을 놓아버리고 나면 자연스레 욕망의 대상에 대한 집착도 여의어 지고 따라서 괴로움도 소멸되어 버립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고자 하는 "욕망"이 없으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느냐고 반문합니다. 수행자는 대답합니다. 욕망에 의한 삶이 아닌 "필요"에 의한 삶을 살아가라. 욕망에 의한 삶은 끝이 없습니다. 한 가지 욕망이 성취되면 곧바로 또 다른 욕망을 일으킵니다. 설령 우주를 다 준다해도 그 욕망은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필요"에 의한 삶을 사는 이를 수행자라 이름합니다. 무소유는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필요"에 의한 소유를 하라는 것입니다. 배가 고프면 밥과 반찬이 있어 주린 배를 달려면 됩니다. 옷이 필요하면 누더기라도 걸치면 그만입니다. 돈을 벌고자 하면 취직을 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욕망"은 배가 고프면 보다 좋은 밥과 맛있는 반찬을 원하고... 옷이 필요하면 비싸고 좋은 옷을 가지려 하고... 돈을 벌고자 하면 끊임없이 만족치 못하여 수억을 벌어도 모자란 마음을 일으킵니다. 그저 필요한 것 있는 대로 쓰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우린 거기에 "욕망"을 가미하여 "더 좋은 것" "더 맛있는 것" "더 많이" "더 높게"를 바랍니다. 옛날 부처님 당시 수행자들은 누더기 한 벌, 바루 하나면 충분한 삶을 살았습니다. 보다 좋은 색깔 누더기, 금으로 만든 밥그릇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밥만 주면 밥만 먹고 살았고... 적으면 적은대로 조금씩 먹고... 많으면 많은대로 여럿이 나누어 먹고... 영양가 많은 고기가 나오면 아픈이에게 나누어 먹이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살았습니다. "욕망"이기보다 "필요"에 의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린 무언가를 끊임없이 가지려고 합니다. 가지지 말고 무조건 없이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지는데도 방법이 있습니다. "필요"에 의해 가지려는 마음은 이타적인 "서원"이며 "욕망"에 의해 가지려는 마음은 이기적인 나만 잘 되자는 "기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 돈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돈을 베풀기 위해 돈을 벌겠다는 것은 "서원"이며 "필요"에 의한 삶입니다. 어리석어 사회에서 당하고만 사는 이에게 지식을 베풀기 위해 학교를 다니고 큰 돈 들여가며 공부하는 것 또한 "필요"에 의한 삶입니다. 보다 많은 이를 포교하기 위해 절을 짓고 불사를 일으키는 것 또한 바람직한 가짐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여기에서 말하는 필요는 나에게 필요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필요한 것을 보다 많이 충족하는 것은 "욕망"입니다. 정작 궁극에 가서 사회를 위하고 남들을 위하는 보다 넓은 길을 걷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가지는 것이 "필요"에 의한 삶입니다. 예로부터 수행자는 생명이 있어야 수행하고 교화할 수 있기에 음식을 취할 지언정 맛에 탐닉하여 음식을 먹지 않는 다고 하였습니다. 이 모두가 "필요"에 의해 살아간다는 수행자의 자세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최소한의 의, 식, 주를 갖추지 못한 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누구나 "필요"에 의한 삶은 누리고 있습니다.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눕지 못하는 이는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없습니다. 북한이나 인도, 소말리아 등지의 당장 빵 한 조각에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소수민들에게나 "괴롭다"는 말이 통한다면 조금 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필요에 의한 최소한의 것도 충족되지 않는 이들을 위해 오히려 우린 뛰고 또 뛰어 베푸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되고 수행이 되어야 합니다. "최소한의 필요"에 의한 것들이 충족되지 않는 이에게... 그런데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없다" "없다" 하며 "괴롭다" "괴롭다"를 연발 합니다.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행복함"을 느끼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누구나 "욕망"에 의한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지금 이 순간 행복할 수 있고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필요"에 의한 삶을 사는 순간 우린 모두가 행복하고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너무나도 당당한 수행자이며 우주를 내 안에 품고 있는 거칠 것 없는 참생명 주인공입니다. 보다 좋은 것을 먹고 싶고 보다 좋은 집을, 좋은 차를 사고 싶고 보다 높은 지위에 오르고 싶고 보다 육신을 편안하고 안락하게 하고 싶고... 이 "보다..."가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중생은 "욕망"에 의해 세상을 살아갑니다. 지혜로운 수행자는 "필요"에 의해 세상을 살아갑니다. 중생은 수억을 가지고도 불안하며 불행합니다. 수행자는 누더기 한 벌, 바루 하나를 가지고도 세상을 움직입니다. "필요"에 의해 마음을 일으키면 법계에서 수억, 수천억이라도 끌어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다"는 상이 없으니 아무리 끌어다 써도 업이 되는 일이 없습니다. 모두가 밝으신 부처님 일입니다. 법계의 일입니다.
    출처 : ♡。좋은하루‥… 。
    글쓴이 : 생비랑☆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