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용 사진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 북한은 절대 이렇지 않습니다.
시사IN 고재열 기자입니다. 독설닷컴
지난해 말, 언론인 방북단의 일원으로 평양과 묘향산에 다녀왔습니다.
북측 언론본부와 만나서도 시사IN 기자? 라고 소개하고 덧붙여'인터넷 블로그 <고재열의 독설닷컴> 운영자입니다' 라고 소개했습니다.
2009/01/17 - [블로거가 본 평양] - 북한 여성들의 최신 패션, '트레이닝룩'
2008/10/26 - [블로거가 본 평양] - 북한 어린이들의 살인미소 모음 (블로거가 본 평양)
2008/10/23 - [블로거가 본 평양] - (평양 소식) 내가 본 북한의 10대 얼짱
2008/10/30 - [블로거가 본 평양] - '웃음국장'과 '알아맞추기영웅'이 평양에 간 이유
박현 전도사님 천국 지옥 간증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바울성전에서 유럽선교회 주최로 열린 예배에서 박현 전도사님이란 분이 간증한 내용으로서,
지구촌순복음교회에서 전도용으로 제작한 테이프
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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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가서 후회말고 예수믿고 천국가자!"
"Don't regret in hell, Believe jesus and go to heaven!"
하나님의 감동으로
지금 미국 LA 곳곳 미국인들에게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운집된곳이 있으면 달려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시작하기전에는 몰랐는데 잠자는 영혼들을 바라보며 천국 지옥을
목이 쉬어라하며 전하고 있습니다. 전할때마다 영적인 공격이있어
머리가 깨어질듯이 아픕니다. 간절히 호소합니다. 저를 위해 기도바랍니다.
이 영적싸움에서 이겨나갈수 있도록.....고국에서 중보기도를 바랍니다.
2004년때 탈복자들의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올려 드립니다. (꽂제비들)
(클릭) http://www.youtube.com/watch?v=ITBqRSMBWaM
http://www.youtube.com/watch?v=Ct9EBaazVNE
http://www.youtube.com/watch?v=YZ7j8NwqtKQ&feature=related
http://www.youtube.com/watch?v=2vVjPfKlE78&feature=related
http://www.youtube.com/watch?v=31fzhB1E55c
http://www.youtube.com/watch?v=tePpw33j15Q
http://www.youtube.com/watch?v=ITBqRSMBWaM
미국 youtube에 올라온 북한의 공개처형 장면
공개처형 장면1 Public execution in North Korea 2006
(클릭) http://www.youtube.com/watch?v=nCK_HjAyuRs&feature=related
미국 youtube에 올라온 북한의 공개처형 장면
공개처형 North Korea - public execution in Hoeryong
(클릭) http://www.youtube.com/watch?v=6R3UeqYinF4&NR=1
추적 60분, 2008년 11월 28일 지금 북한의 실생활을 공개해본다
20081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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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취재
2008년 가을, 지금 북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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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북한은 남북경제 교류의 상징인
개성공단의 인력축소와 남북 간 육로 통행을 제한하겠다는
일방적인 실행조치를 남측에 통보합니다.
지금껏 이어져 오던 개성관광의 전면 차단과
남북철도 운행까지도 불허하겠다는 북한!
그 강경한 입장에 대한 사회적 파장은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추적 60분>에서는
최근 북한 사회의 실상을 담은 영상 단독 입수!
북한주민들의 생생한 삶의 모습과
급 변화 하고 있는 북한사회의 오늘을 직접 확인했습니다.
이를 통해 보다 사실적인 북한의 사회 경제적인 변화를 분석하고
경색 국면에 놓인 현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을 긴급 진단합니다.
【주요 내용】
■ 2008년, 식량난 그 후... 북한주민의 생활상 전격 공개!
추수가 한창인 10월의 북한, 옥수수밭 한 가운데 높이 솟아있는 움막이 보인다. 이 움막은 다름 아닌 경비초소. 수확철을 맞아 농작물 도둑이 기승을 부리고 있어 농장원들이 교대로 경비를 서고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무용지물. 콩수확을 하던 할머니는 경비원과 군인들까지 농작물에 손을 대고 있다며 하소연했다. 올해 제 2의 ‘고난의 행군’이라 불릴 만큼 식량위기에 처했던 북한. 식량난을 겪으면서 북한 사회에서는 생계형 범죄들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 전신주에는 전기선 절도를 방지하기 위해 가시나무를 걸어놨고 산에서 나무를 해오던 여인은 취재진을 강도인 줄 알고 마음을 졸였다. 2008년 식량난 이후, 북한사회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 것일까? 북한 주민들의 일상을 통해 본 북한사회의 변화, 그 생생한 모습들을 공개한다.
■ 북한 정부의 ‘시장경제 통제’, 그 속뜻은?
황해남도 해주시 골목에 들어선 장마당, 상인들이 갑자기 분주하게 자리를 이동하기 시작한다. 곧이어 단속원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등장해 아직 좌판을 정리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호통 친다. 노동자 규찰대가 짐꾼들의 손수레를 압수해가는 모습도 포착됐다. 작년 10월부터 강화하고 있는 장마당의 단속 현장들이다. 98년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한 북한. 2003년 장마당이 합법화된 이후 현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면 자연스레 시장이 형성될 정도로 그 규모가 확대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집단노동을 거부하고 개인적인 경제활동에 치중하자 작년 10월부터 당국이 시장경제에 대한 통제에 나섰다. 시장 단속이 강화되면서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거래도 암암리에 이뤄지고 있다.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5층의 아파트 건물, 1,2층에 벌써 사람들이 들어 살고 있다. 아파트 가격은 골조만 있던 1층 집이 천 5백 달러. 완공된 상태로는 3-4천 달러라고 한다. 하지만 북한에서 부동산 거래는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거리 곳곳에는 규찰대가 배치되어 경제 활동 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에 대한 통제도 시행되고 있다. 최근 들어 북한 주민에 대한 당국의 통제가 강화되는 이유와 그 의미는 무엇일까?
■ 급변하는 북한 사회의 내일은?
북한 당국의 강압적인 사회통제에 주민들이 저항하기 시작했다. 해주시의 거리, 규찰대와 여성 사이에 말다툼이 벌여졌다. 바지를 입고 거리에 나왔다는 것이 단속의 이유다. 여성은 당국 통제의 형평성을 지적하며 맞섰다. 더 이상 북한 주민들은 당국의 불합리한 통제에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을 기세다. 시장경제 도입 이후, 주민들의 자본주의적 의식의 성장과 함께 이완된 체제를 놓고 당국은 딜레마에 빠져있다. 남북관계가 경색된 가운데, 미국도 정권교체를 앞두고 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북한사회는 과연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북한 사회의 실상과 변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우리의 대북정책을 진단하고 앞으로의 남북관계를 전망해본다.
2008년 6월과 7월에 3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아사 사태가 예상되었다.
지난 5월 26일 '사단법인 좋은벗들'이 주최한 전문가간담회의 발표에 따르면 현재 북한에서 당장 필요로 하는 외부 지원량이 보리, 옥수수, 밀가루 등 서민층 주식으로 150만 톤(5개월 분)이라고 한다. 때문에 6, 7월에 필요한 20만 톤을 긴급지원 할 경우 북한 주민들이 당장 연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해 좋은벗들은 육로와 해로를 통한 인도적 차원의 분산지원을 제시했다.
FAO의 통계를 인용한 그래프에 따르면 북한의 식량생산량은 1988년부터 꾸준히 감소추세를 보여왔고, 통계청의 자료를 보아도 식량생산량이 증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좋은벗들이 추산한 2007년 식량 총 생산량은 2006년 280만 톤에서 2007년 250만 톤으로 감소하였는데, 이는 그 해 몰아친 대홍수와 2006년 북한의 미사일 발사 및 핵 실험으로 인한 국제 사회의 냉대로 인한 결과로 해석된다.
한국교회 북한땅에 뿌려진 순교의피 기억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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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naver.com/pup21.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180
(대통령을위한 기도 시민 연대)
목숨걸고 신앙 지키는 북한 성도들
체포, 구금, 고문, 심지어는 처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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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naver.com/manminlove.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88
(만민 중앙 성결 교회 네이버 까페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나의 마음속에 모셔들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뿐인 독생자 예수님을 대신 죽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당신의 영혼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의 초대를 거절하지 마세요.
이 기도를 진심으로 따라 하세요. 주님이 받아 주실 것 입니다.
기도문안
살아계시는 하나님 아버지. 저는 죄인입니다.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회개하고 돌아섰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저를 씻어주시옵소서.
저를 위하여 죽으시고 저를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 구주로 모셔드립니다.
지금부터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살겠습니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저를 구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도록 하셔서 이미 모여 기도하고 있으며 한 자리에 모일 수
우리들의 기도 한 달 동안 울다가 왔습니다!
우상숭배의 죄악으로 물들지 않기를... 설 명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북한 지하교회 성도의 일기 1999년 7월 19일 구름은 끼었으나 갠 날씨다. 오늘은 호숫가에 가서 휴식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남조선에서 이곳으로 와 회사를 경영하는 분들의 가족도 함께했는데 이들의 모습은 조선에서 듣던 것과 너무도 다르게 다정다감하다. 선교사님이 '조선에서 성경을 배우려고 온 조선 지하교회 일꾼'이라고 나를 소개하자 모두들 뜨거운 박수를 쳐주고 다정한 미소를 던져준다. 악한 모습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분들이다. 조선과 인접한 지역에 파견되어 공화국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이만여명의 안기부 첩자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도마음씨가 고운 분들이다.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며 조선에 갈 때 태어날 아이들에게 입힐 고운 옷을 사 가지고 가란다. 헤어질 때는 무엇인가 더 줄 것이 없으니 휴대용 분이며 연지를 발라준다. 저들이 나에게 돈이랑 분이랑 연지를 주어서 좋은 사람들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조선 사람들에게서 찾아보지 못했던 다정함과 인자함이다. 천사가 정해져 있겠는가? 바로 남조선 사람들이 천사라 생각한다. 조선 사람과 남조선 사람을 비교할 때 조선에서 제일 의로운 사람이 남조선에서 제일 못된 사람과 같다고 한다. 그러니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있단 말인가. 첨 보는 사람인데도 이들은 '형제님, 자매님'하고 선생도 아닌데 '선생님, 선생님'한다. 조선에서 '이 새끼, 이 간나'소리만 듣다가 이런 소리를 들으니 별천지에 온 것 같다. 1999년 7월 28일 우리가 공부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서인지 무더운 열기를 식혀 주는 단비가하루 종일 내렸다. 오랜만에 비가 내리니 신선해져 공부하기가 너무도 편안했다. 오늘 공부를 마친 후 조선으로 돌아가는 동지들 편에 보낼 옷 보따리를 꾸렸다. 동지들이 조선으로 돌아가는데 줄 것이 없다고 철윤 동지가 전화를 했었기 때문이다. 철윤 동지의 전화를 받자마자 선교사님이 부지런히 어디론가 전화를 하셨는데 신기하게도 오늘 많은 사람들이옷을 가져왔다. 게다가 동지들 스라며 너도나도 돈을 내놓고 가서 적지 않은 돈이 모아졌다. 너무도 고마운 분들이다. 강요한 사람도 없는데자발적으로 돈지갑을 열어 돈을 꺼내놓는 모습에 눈시울을 적셨다.
매년 2월 16일에는 김정일의 생일을축하하는 충성의 노래모임(북은 매해 김정일의 생일을 축하하는 경축공연을 당, 행정각 동맹위원회 별로 진행함)을 여는데 참가하는 배우들에게 먹일 쌀을 내도록 강요한다. 혜옥이는 "당장 입에 거미줄을 쓸게 된 판국에 내어줄 쌀이 어디 있는가?" 하고 한마디 했다가 사상투쟁무대에 올라 장군님에 대한 충성, 효성의 마음이 없는 여맹원이라고 비판당했었다. 혜옥이는 결국 '위대한 장군님에 대한 충성심,효성이 없는 것이 결국 나를 죽인다'는 유서를 목에 걸고 광장에서 목을 매달았다. 만약 내가 쌀을 대신 내주었으면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당하진 않았을 텐데.. 혜옥이의 죽음은 내게 평생의 후회로 남아 있다. '하나님을 믿는 여자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여자가 한 홉의 쌀마저 없어 굶주림에 시달리는 혜옥을 대신하여 어찌 한 줌의 쌀도 내어줄 수 없었단 말인가'하고 너무도 뼈아픈 질책을 한 나다. 한 나라 한 인민반에서 코를 맞대고 살던 나는 한 줌의 쌀을 내주기 꺼려하여 결국 하나의 주검을 낳게 했는데, 조선에서 민족의 원수라며 침 뱉고 있는 남조선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 아낌없는 지원을 하고 있다. 사상도 이념도 다른데 우리를 적대시하지도 않는다. 식당일이며 장마당 장사며 안 해본 일이 없는 나는 저들이 조선 사람들에게 내어주는 돈이 어떤 돈인지 잘 안다. 저들의 피와 땀으로 벌어진 돈인 것이다. 저 돈을 아무 생각 없이 준다고 받는다는 것은 너무도 무지몽매한 일일 것이다. 남조선은 자본주의 나라인데, 조선의 주체사상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저런 사람들이 어찌 만들어진 것인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1999년 8월 5일 가을 곡식이 무르익어 가는 달이어서인지 날씨가 참으로 맑다. 조선의 농촌은 지금쯤 강냉이와 보리가 한창일 것이다. 아버지와 오빠들이 지은 농사 작황은 어떤지, 힘들게 지은 낟알을 군대아이들에게 다 도적질당하지는 않았는지 궁금하다. 오늘 학습 도중 하나님께 기도할때, 이런 일을 가지고 기도해도 되는지 물으니 그렇게 해도 된다고 한다. 하나님이 하늘의 군대를 보내주시어 그 밭의 곡식을 지켜달라고 기도하라고 한다. 참 구차스런 일이다. 가을이 되면 곡식을 놓고 일어나는 전쟁이 참으로 지겹다. 나라를 지켜야 할 인민의 군대가 인민들의 곡식밭을 습격하여 낟알을 훔쳐다 술 바꾸어 먹고, 인민은 인민대로 한해살이의 명줄이 달려 잇는 곡식밭을 지키기 위해 밤낮 곡식밭에서 살면서 눈을 쥐어뜯는다. 나라가 망해가면 군대가 먼저 토비가 된다는데, 조선의 앞날도 멀지 않은 듯싶다. 인민의 군대라는 것들이 밥 한 그릇 놓고 물고 뜯으며 저들끼리 싸우다 총격전가지 벌어져 죽은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입에 담기조차 창피스럽다. 1999년 8월 21일 며칠 전 철윤 동지에게 전화가 왔다. 철윤 동지는 경환 동지가 조선에 들어가도 안전이 보장되겠다며 빠른 시간 안에 학습을 끝내라고 했다. 이미 학습을 받고 조선으로 돌아가 있는 동지들과 합세하여 보위사령부 검열에 파괴된 우리 지역 기도회 조직을 복구하라고 했다. 때문에 우리는 밤낮없이 학습에 몰두했다. 너무도 많은 강의를 하여 선교사님이 목이 다 쉬었기 때문에 오늘은 자체학습을 하기로 했다. 지금 생각하니 이 몇달간의 학습을 통해 날개를 단 것 같다. 결정적이고 중요한 말씀들은 모두 암송했다. 선교사님이 성경말씀 중 요한복음을 잘 알아야 한다고 하시기에 요한복음은 모두 암송했다. 조선에 넘어가 옛말 하듯이 하면서 장마닥 아낙네들에게 요한복음의 내용을 알려줄 생각이다. 1999년 9월 11일 드디어 학습과정을 끝낸 우리는 선교사님들과 여러 선생님들의 전송을 받으며 조선으로 돌아왔다. 몇 달간 학습을 하면서 정이 든 선교사님은 우리가 넘을 강가까지 따라와 강을 건너는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통일의 그날 다시 만나자는 말을 하시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하라는 당부를 하신다. 가슴 뜨거운 감동 속에 우리는 "주 안에서 승리하리라"는 결심의 말을 남기고 강을 건너왔다. 떠나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강을 건너와 보니 너무도 생소하게 느껴지는 조국이다. 조국,, 조국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품안에 안은 자식 같다고 할까. 이리가 득실거리는 곳이라 해도 조국이라는 이름 앞에 마음이 숙연해짐을 어찌 할 수가 없다. 아무리 악독이 살판친다 하여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영혼들의 있기에 이 땅을 너무도 사랑하신다는 예수님. 그런 예수님을 생각하니 이 땅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진다. 오늘 이 시각부터 이 땅을 하나님나라, 낙원의 동산으로 가꾸어가야 할 임무가 나에게 주어졌다. 외치리라! 저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나는 저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외치리라! 1999년 9월 12일 맑은 날씨다. 오래간만에 장마당으로 나갔다. 과부동맹원들의 얼굴이 몹시 축갔다(일정한 수나 양에서 모자람이 생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타나자 너무 반가워하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언제나 그리던 귀중한 이 여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이들 모두를 주의 나라로 인도해야 한다. 이들이 그 어떤 힘으로도 허물어 버릴 수 없는 하나님나라의 초석이 될 것이라 믿는다. 장사를 끝내고 불마차와 금순이를 집으로 데려와 남조선 선생님들이 준 크림이며 입술연지, 옷을 나누어 주었다. 모두들 너무도 기뻐했다. 이들이 기뻐하니 나의 마음도 말할 수없이 기뻤따. 난 이들에게 밤이 늦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해 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배웠던 말씀이 어찌 그리 기억이 잘 나는지 바로 책을 읽는 듯하다. 불마차와 금순이는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기까지 한다. 이번에 하나님 말씀을 단단히 배우고 온 모양이라며 자기들에게 한 말을 세 번씩만 반복하여 얘기해 달란다. 그러면 저들도 기억을 하여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겠다고 한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는 순간이라 난 믿는다. 성경말씀을 이야기처럼 알기 쉽게 글로 만들어 보급할 생각이다. 보위사령부 검열도 이젠 지쳤는지 좀 뜸한 것 같다. 이럴 때 역습을 들이대서 조직을 확대 강화해 나갈 생각이다. 경환 동지는 되도록 위험한 일을 피하게 해야 한다. 아내의 일로 도시에서 추방되어 이곳에서 숨어 사는 경환 동지가 너무 나서면 신변에 위험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전에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서 나서지 못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성경의 역사를 보아도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는 큰일을 해냈던가. 선교사님의 말씀에 남조선에서도 교회일은 여자들이 더 잘한다고 하셨는데 북조선이라고 여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못한다는 법이 없지를 않은가? 옛날의 여선지자들처럼 나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더 많이 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이다. 1999년 9월 18일 오늘 우리에게는 또다시 불행이 닥쳐왔다. 오늘 새벽에 중국에서 북조선 이곳에 와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다른 동지를 만나려 길을 나선 철윤 동지가보위부 사람들에게 체포된 것이었다. 즉시 민철 동지의 지도 하에 특별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일로 보위부는 우리 숨통을 또다시 조이려 할것이다. 우리는 조직의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 다는 모르나 우리 조직 총책임자인 철윤 동지는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는 우리 조직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 특히 근래에 성경집중 훈련을 받고 돌아온 동지들 수십 명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철윤 동지를 잡지 못해 눈에 핏발을 세웠던 사람들인지라 다 잡은 고기인 철윤 동지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없다. 특히 이미 체포되어 옥사한 동지들 중에는 고문을 이기지 못해 철윤 동지가 하는 일에 대하여 진술한 이들도 있다. 때문에 얼마나 많은 보위부 사람들이 중국의 산야를 참빗으로 훑듯 성경집중훈련소 토벌에 나서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탕자히 못한 성경집중훈련소 두목을 중국도 아닌 조선에서 잡았으니 이들이 얼마나 쾌재를 올리겠는가. 아마도 다른 동지들에게 가해지는 고문의 몇 십 배, 혹독한 고문이 가해질 것이다. 보위부는 철윤 동지가 중외인 중에 중죄인이라며 '삶은 개도 비명을 지른다'는 꽃 둥지로 압송해 갔다. 비상대책회의를 하긴 했으나 별다른 대책이 없다. 오직 하나님께 철윤 동지의 생사를 맡기고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다만 철윤 동지와 관련이 있다고 보위부에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몇 명의 동지들을 성경집중훈련소에 있는 황 동지 에게 보내기로 했다. 이러한 결정에 철환 동지는 우리가 철윤 동지를 믿지 못해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 같다며 몹시 미안해했다. 경환 동지는 아마 철윤 동지라고 해도 이런 조치를 취했을 것이라고 한다.
앞으로 언젠가 나도 당해야 할 일이지만, 동지들이 먼저 당하는 그 공통을 감히 상상하기가 두렵다. 철준 동지의 축음과 철진 동지의 죽음, 영석 동지와 혜선 동지의 죽음까지, 많은 동지들의 죽음앞에 부들부들 치를 떨던 철윤 동지도 결국에는 죽음이 기다리는 단두대 앞에 서게 되었다. 아, 언제면 동지들의 피를 부르는 이 참혹한 현실이 끝을 보겠는지, 죽는 동지들도 고통스럽겠지만. 그 죽음을 지켜보는 우리의 마음도 갈기갈기 짖어진다. 너무도 잔인한 세상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동지들의 죽음은 성스러운 것이나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너무도 참혹하다. 하나님께서 언제면 이 나라에 평화를 주시려는지... 우리의 기도가 미약해서 아직 이 나라에 평화를 주시지 않는 것인가? 1999년 9월 23일 철윤 동지의 체포로 인하여 하루하루 긴장을 한 탓에 피를 말리는 시간이 흐른다. 철환 동지(안전부 직원)의 말에 의하면 며칠도 안 되는 고문에 철윤 동지의 온몸에는 뼈만 남았고, 그 상태라면 이제 며칠을 더 견디지 못하고 옥사할 것 같단다. 중죄인들에게 가해지는 고문이 철윤 동지에게 가해지는데 아무 말 없이 가해지는 고문을 잘 견디어 내고 있다고 한다. 이제는 철윤 동지가 하나님 앞에서 옳은 죽음을 맞게 열심히 기도해 주자고 하며 철환 동지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보인다. 철윤 동지가 아니었으면 정말이지 철호나 동지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란다. 철윤 동지는 철환 동지로 인하여 대학에서 쫓겨나 인생의 파멸을 당해야 했는데, 서운한 내색도 하지 않았단다. 때문에 오늘날 철윤 동지와 철환 동지가 피를 나눌 동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철윤 동지로 하여금 철환 동지가 얼마나 많은 동지를 죽음에서 건질 수 있었는가. 죽이기에는 참으로 아까운 동지들이다. 저들이 남조선에서 산다면,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일을 할 것인가! 어차피 가야할 길이지만 너무도 일찍이 죽음의 길로 가는 저들이다. 하늘나라 인생은 아까울 때 가는 인생인 모양이다. 모든 동지들이 나이 사십도 못되어 죽음의 길로 가지 않았는가. 또 예수님의 삼십 삼 세의 꽃다운 나이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지 않았는가. 죽었다 살아난 복실 엄마 말이 생각난다. 죽으니 참 좋은데 숨이 넘어 가기 전은 참으로 고통스럽단다. 죽은 후가 어떤지 물으니 구름 위에 앉아 둥둥 떠도는 기분이란다. 고생하며 살아가는 장마당 안의 과부들이 참으로 불쌍하게 느껴져 함께 있기를 청하니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더란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사람이 죽어도 정신만은 살아 있다며, 죽은 혼이 구천에 떠돈다는 게 그런 것이더란다. 모두들 엉터리 철학박사라고 놀려대는데,복실 엄마는 엉터리 소리가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자기 말을 정 믿지 못하겠으면 죽어 보란다. 복실 엄마의 말에 나는 사람이 죽는다고 정신까지 죽는게 아니며. 사람에게 영혼이 있는데 그 영혼이 살아서 어떤 영혼은 지옥에 가고 어떤 영혼은 천국에 간다고 말했다. 아마 복실 엄마가 죽어서 편안했던 것을 보니 천국에 간 모양이라고 하니 아낙네들이 천국과 지옥에 대해 물어오낟. 나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내 말을 들은 아낙네들이 "너도나도 사람이 한 번 꼭 죽는데 왜 지옥에 가겠는가. 누가 이 고생하며 살다가 지옥에 가고 싶겠는가. 순영이 너는 어디로 갈 것 같은가?" 하고 물었다. 나야 당연히 천국에 갈 것이라 대답했다. 자기들은 어디로 갈 것 같으냐고 묻기에 내 말을 잘 듣고 그래도 하면 천국에 갈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이제부터 나를 우리 과부동맹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하겠다고 난리들이었다. 이들의 만장일치로 나는 헤선 동지의 뒤를 이어 장마당 안의 과부동맹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가만히 보면 모든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은 다 싫어하고 있다. 그러기에 물건을 도적질하고 달아나는 사람에게 그냥 욕하면 '흥'하고 콧방귀 귀지만, '지옥이나 가거라!'하면 되돌아와 결사적으로 싸우려고 덤벼들지 않는가. 천국과 지옥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일지라도 이미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개념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음을 이들의 행위를 통해 잘 알수가 있다. 그러고 보면 철윤 동지가 너무도 많은 고생을 했으니 하나님이 그를 편안하게 해 주시고자 천국에 데려가는 모양이다. 복실 엄마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미 전에 순교한 모든 동지들의 영혼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저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우리가 죽음이 두렵다 하여 하나님의 일을 게을리 한다면 저들 보기에 얼마나 망신스런 일인가! 동지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절대 이대로 멈출수 없는 나다. 1999년 10월 8일 오늘 나는 하루 종일 가슴을 졸이며 하루를 보냈다. 오늘 새벽 불의에 보위부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경환 동지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나는 그런 사람을 모른다고 딱 잘라 말했다. 나의 부인에 보위부 사람들은 별의별 욕을 다 퍼붓는다. "네가감옥 안의 신선한 맛을 좀 보아야 제대로 악재기(입을 뜻하는 상스러운 말)를 놀리겠는가? 네 배때기안에 있는 애 새끼가 경환 놈의 새끼인 줄 우리가 모를 것 같은가? 과부가 어떻게 애를 가져? 경환 놈이 있는 곳을 바른대로 알려 주지 않으면 네 배 안에 잇는 핏덩어리를 끄집어내서 죽탕을 치겠다." 한바탕 욕을 퍼부은 그들은 단 한 발짝이라도 집밖으로 나가면 뼈를 분질러 놓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철윤 동지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경환 동지에 대한 말을 진술한 것인가? 만약 철윤 동지가 경환 동지에 대해 발설했다면, 나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을 테? 나를 가만히 두는 이유는 무엇인가? 철환 동지는 철윤 동지가 그렇게도 무서운 고문을 잘 이겨내서 며칠 전 감방으로 끌려갔다고 했는데... 무슨 일인지 통 갈피를 잡지 못 하겠가. 나를 미끼로 삼아 동지들을 잡아내려는 술책일까? 어쨌든 우리 집에 대한 집중 감시가 붙었을 테니 경환 동지가 집에 나타ㅈ나지 말아야 하는데... 나는 너무 안달이 나서 창문을 내다보며 하나님을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셨는지,다행히 오늘 하루 종일 경환 동지는 집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행이다. 다년간 쓴 이일기를 불태워 버려야 할 것같다. 앞으로 일이 험해져 우리 집에 대한 수색이 있게 된다면 이 일기가 치명적 증거가 될 것이다. 그건 그렇고 경환 동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근심이다. 제발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빈다. 1999년 11월 22일 오늘 난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소식에 눈물로 하루를 보냈다. 기도회 조직에 대한 일로 함흥지구에 갔던 경환 동지가 이곳에 돌아와 역에 내리는 순간, 보위부사람들이 그를 체포해 갔다는 것이었다. 자신을 체포한다는 것도 모른 채 개찰구를 나오다 바로 체포되었다고 한다. 철윤 동지도 체포되고, 경환 동지마저 체포되었으니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거야 정말 해도 너무 하지 않은가!험악한 이 현실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오늘 저녁 철환 동지(보위부 직원)가 우리 집에 왔었는데 경환 동지가 집에 성경이나 비밀 문서를 감춘 것이 있으면 즉시 소각해 버리라고 한다. 경환 동지가 체포된 근본 동기는 조직에서 배포한 기독교 관련 실화집들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경환 동지에게 임무를 받고 00시로 가던 동지 한 명이 열차지붕에서 떨어져서 몸에 간수하던 책들이 떨어졌고, 그 안에 경환 동지가 책을 보고 느낀 소감을 쓴것이 있었단. 동지가 열차지붕에서 떨어져 죽지만 않았다면 그런 일이 업었을텐데.. 모든 전후 사연을 들은 나는 철윤 동지에게 미안했다. 감옥 안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조직과 동지들을 지켜내고 있는 철윤 동지인데 의심한 것이 너무도 안타까워 한참이나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저 암담할 뿐이다. 철환 동지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경환 동지와 나의 관계를 완강히 부인하라고 한다. 나마저 보위부로 끌려가면 경환 동지가 모든 일을 부인하기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죽는다 하여도 경환 동지는 사랑하는 내 남편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경환 동지의 안전을 위해 부인해야 한다. 자기 남편을 남편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 세상에 사는 우리가 너무 불쌍하다. 일이 왜 이렇게 험악하게 번져가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민철동지와 그 외의 동지들을 찾아가 토의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감시 때문에 마음대로 찾아갈 수도 없고 정말 안타깝다. 이 안타까운 마음을 하나님은 알고 계실까? 어쩌면 그리도 매사에 신중하던 경환 동지가 그런 실책을 범할 수가 있는 것인가?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제 경환 동지마저 잃는다면 더는 살고 싶지 않다. 제발 하나님이 경환 동지를 지켜주시기를 빌고 또 빌 것이다
북한 지하교회 지도자를 찾아서 脫北 또는 중국을 방문한 북한 지하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서 다시 북한으로 보내는 중국 내 움막교회 최초 공개 북한의 한 道에서만 약 8만권의 성경 압수. 金正友 月刊朝鮮 기자 (hgu@chosun.com)
중국 지린성 한 야산에 위치한 움막교회. 이곳에선 북한 지하교인들을 대상으로 성경공부를 시켜 다시 북한으로 들여보낸다. 움막교회 내부 모습. 중국 지린성 투먼(圖們)과 북한 온성군 南陽(남양)구를 잇는 ‘도문대교’. 중국에서 붙잡힌 수많은 탈북자들이 이 다리를 통해 北送됐다. 북한 지하교회 신자들이 비밀 처소에 모여 성경책을 가운데 놓고 기도하고 있다. 한 북한 지하교회 신자가 성경 구절이 녹음된 MP3를 듣고 있다. 왼쪽 가슴에 달린 김일성 배지가 눈에 띈다. 북한 지하교회 신자가 사용해온 찬송가와 성경책. 1945년 해방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독북한인연합 이민복 대표가 북한에 날려보내는 ‘삐라(전단)’와 각종 물품들. 김정일 정권의 허구성과 기독교 복음에 대한 내용이 인쇄되어 있다. [출처] [현지취재] 북한 지하교회 지도자를 찾아서 |작성자 요한
혜옥이는 올해 19살의 어엿한 처녀입니다. 중국의 작은 마을에서 선교단체의 보호 속에 살고 있습니다. 혜옥이의 가족은 3대째 이어져 오는 기독교 집안입니다. 처음에는 저희들도 쉽게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저 금단의 땅인 북녘에 이 찬송가의 가사 내용이 외진 산 골짜기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처절한 핍박 과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북녘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믿고 전도를 했다는 이유로 보위부에 고발이 되어 옥에 갖히어 갖은 고초와 핍박을 받고있다.
핍박 가운데서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결코 변절치 않고 끝까지 신앙의 정절을 지켰을 뿐만아니라 , 오히려 그곳의 강팍한 관원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므로 기독교인의 아름다운 믿음을 증거하게 된 사건이 최근에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8년전에 이북의 한 아주머니는 중국에 사는 친척을 방문하러 왔다가 그들에게 전도를 받아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 주로 영접하고, 북한에 돌아가서도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 그는 처소교회에서 열심히 배우고 마침내 귀국하게 되었다. 그녀는 몇개 월 동안 성경을 여러번 통독하였고, 자신이 그동안 보아왔던 성경을 무사히 가지고 가기 위해 1주일 동안 금식 기도까지 하였다. 이들이 갇혀 있을 때 건너 편의 성도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 북의 다른 성도가 쪽지를 보내어 물질과 기도의 도움을 청했었다.
"하나님 아버지는 언제나 우리의 곁에 계시어 불행에 빠진 우리들을 보살피고 계십니다. ~~~~ X와 X는 그 안에서도 하나님의 딸답게 계속 기도를 드리면서 생활을 꿋꿋이 하고 있읍니다. 우리 집에서도 그들이 무사하기를 계속 기도를 드립니다. ~~~~~ 이번 일을 통하여 많은 경험을 쌓았고 앞으로는 이같은 일이 생기고 더 큰 일이 부닥쳐도 하나님께 의탁하고 뚫고 나갈 자신심이 생기고 배짱이 생깁니다. ~~~~~ 이땅에 떳떳한 하나님의 예배당이 세워져 화목하게 살 그 날을 위해 우리 모두 함께 나서야 하지 않겠읍니까? ~~~~ 불행한 우리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고 꼭 도와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와같이 이들은 주안에서 한 형제 자매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한 마음이 되어 기도를 하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엿 볼 수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자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서 모든 성도들이 힘써 기도를 하였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행12:5)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북녘의 성도들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게 하시며, 때로는 이들과 같은 옥중의 연단을 잠시 허락하시어 그들 의 신앙이 정금과 같이 되도록 친히 저들을 연단하시는 가운데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있다. 이순간도 이들은 성도로서의 신앙 을 지키면서 그 땅에도 편지의 내용과 같이 "하나님의 예배당"이 세워지는 그 날을 간절히 소망하면서 그때를 위해 준비하고 있다. 선전용 사진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 북한은 절대 이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지금 북한은 이렇지 않다. 이해하려고해도 북한은 이렇지않다. 이곳 미국으로 정식 입국한 탈북자 한 귀순용사는 이 사진들을 보자마자 대뜸 하는말이 "이것 선전용 사진입니다" 하는 것이다. 북한은 지금 아사 상태다.먹을것이 없어 죽어가고 있다. 우리 언론인들이 정말 북한이 어떤곳인지 알아야할텐데....사진들을 잘 보세요. 남한 방문단에게 보이기 위한 사진들이라고 이곳 탈북한 군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 이야기합니다.
북한 성도가 보내온 편지입니다
누런 종이에 써 있는 글씨는 북한에서 믿음을 지키는 성도로부터 온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도하면서 전도할 방법을 찾고 있는
있는 아름다운 고백들이었습니다. 전도하여 12명이 모이고 있으며 전도할
대상자를 32명이나 확보하고 기도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없어 3명 혹은 2명씩 모여 예배하고 있으며 20분 정도의 시간을 갖는다는 소식들이
세밀하게 쓰여 있었습니다. 지금도 북한에서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의 행전이
계속되고 있기에 우리의 기도가 멈추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북한 땅에 교회를 세우시고 복음이 증거되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은밀하게 복음전하고 예배하는 성도들을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하여 주옵소서. 우리로 이들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자리에 있게 하시고
저들과 동일한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나아가 기도케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나라가 북한 땅에 충만케 하여 주옵소서.
"기도좀 해주세요!"
현장에서 막 돌아온 일꾼의 요청입니다.
"현장으로 들어갈 때는 성령이 충만하여 정말 기쁜 마음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습니다.
바쁘게 일하고 있으면서 정말 그 속에 아버지가 주시는 기쁨과 평강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가 안타까웠습니다.
예전 같으면 뭐라고 잔소리도 했을 법한데 그냥 눈물만 나오더라구요.
울고 또 울다가 왔습니다. 이제 아버지 앞에서 정말 뜻을 묻고 아버지의 마음에
합한 사역을 원하고 갈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잠잠히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저희에게는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이러한 고백이 오늘 선교사들과 현장 일꾼들에게 있습니다. 많은 일들을 부지런히 그리고
충성되게 감당하면서도 순간 순간 아버지의 뜻에 합당한지를 생각하고 고뇌하는
시간들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여 주님이 이끄시는 뜻에 합당한
사역을 감당하여 풍성함에 거할 수 있도록 기도가 필요합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오늘도 선교현장에 있는 일꾼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 주님 앞에 온전히 서서 행하게 하여 주옵소서. 많은 일들에 밀려
주님과의 친밀함을 놓치지 않도록 늘 권고하여 주시고, 주님을 갈망하는 마음을
더욱 불타오르게 하시고, 그것을 통해 풍성한 사역의 열매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옵소서.
추워지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그 어느 때 보다
바빠지고 있습니다. 설 명절이 되면 유교적인 전통이 가득한 우리 문화에는
조상을 섬긴다는 명목하에 우상앞에 절하는 죄악들이 죄인 줄도 모르고 자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년이 시작되었다고 하여 토정비결 등을 보면서 한해 운수를
보는 것 등이 많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전통적인 관습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우상숭배의 죄악들입니다. 가족들이 오랜만에 만나서 덕담을 나누고 화목한
시간들은 좋은 것이지만 그 이외에 우상을 우리의 삶에 불러오는 죄악들이
더 이상 이 땅에 자행되지 않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너희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너희에게 두지 말라고 하신 주님, 우리에게 설 명절에
흩어져 있던 가족과 친지들을 만나 사랑과 정을 나눌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설 명절이 조상 등을 섬긴다는 명목하에 절하고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악이
이 땅에 관영할까 두렵사오니, 주께서 우리로 죄악 가운데 나아가지 않도록 막아
주시고 깨어 근신함으로 주의 율례를 살피게 하여 주옵소서.
죄악으로 하나님의 진노가운데 들어가지 않도록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인민군 장교나 국가안전보위부 요원들로부터 성경 요청 늘어”
북한의 한 道의 道民 중 34%가 기독교 접해
편집자 注: 기사에 등장하는 모든 人名(인명)과 地名(지명)은 취재원과 탈북자의 안전을 위해 가명 또는 익명을 사용했다. 金·李·朴(김·이·박) 등의 성도 모두 실제 성과 다르다
길을 안내하던 ‘金(김) 선생’이 멈춰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송 사장’과 통화를 몇 차례 시도했지만, 통화권을 벗어났다는 안내 메시지만 나온다. 도심을 떠나 비포장길을 달려온 지 두 시간, 사방엔 온통 울창한 숲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후 5시, 해는 이미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그래도 멀리서 오셨는데, 마지막으로 이쪽으로 한 번만 더 가봅시다. 오, 주님….”
다시 발걸음을 뗀 ‘김 선생’이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정보는 턱없이 부족하고 앞은 첩첩산중이다.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가 쉬울 듯했다.
10분 후, 그의 기도가 통했는지 우리는 목적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깊은 산속에 작은 움막이 있었고, 그 뒤쪽엔 한 노인이 겁에 질린 모습으로 우리를 경계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걱정 마세요. 지난주에 아랫동네서 뵈었던 적 있죠?”
김 선생이 반갑게 인사하자 노인이 숨을 내쉬며 답했다.
“난 또, 날 잡으러 온 줄 알았어. 세 번이나 잡혔다 죽을 각오로 도망쳤는데, 이번에 잡히면 정말 끝이여.”
10월 ○일 오후 5시30분, 중국 지린성(吉林省) ○○시에서 남쪽으로 60여km 떨어진 곳의 한 野山(야산). 우리는 북한 지하교인들의 ‘비밀 교회’에 도착했다. 그곳을 지키던 노인은 양강도 ○○시 출신의 탈북자였다. ‘선생’ ‘사장’ ‘회장’ 등은 외국인 선교가 금지된 중국에서 비밀 선교사를 부르는 호칭이다.
현재 북한의 지하교회는 평양에서부터 중국 접경에 이르기까지 거의 全(전) 지역에 분포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북한의 ‘공식적’ 기독교 조직인 ‘조선그리스도교연맹’과는 다른 형태로, 내부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결성된 가정교회들을 의미한다.
對北(대북) 전문가들은 “지하교인 수가 최소 10만명이 넘으며, 현재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對北(대북) 선교단체인 ‘모퉁이돌 선교회’에 따르면, 1995년 이후 최소 3720명이 처형됐을 정도로 북한 지하교인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지하 가정교회의 ‘지도자’들 중 상당수는 중국에서 기독교를 접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중국 접경의 선교사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한 뒤, 성경책, 찬송가, MP3(성경), 라디오, CD 등을 공급받아 북한으로 다시 들어간다. 이들은 신앙생활이 발각될 경우 수용소로 보내지거나 처형을 당하게 된다.
필자는 북한 지하교인들을 직접 만나기 위해 10월초 중국-북한 접경지역을 다녀왔다. 랴오닝성(遼寧省) 단둥(丹東)에서부터 지린성 옌지(延吉)에 이르기까지, 各地(각지)를 돌아다니며 북한 지하교인과 그들을 지원하는 선교사들을 만났다. 현지에서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들은 한국인을 비롯해 조선족, 미국인 등 다양한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취재과정은 첩보조직의 비밀 작전을 방불케 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일정이 모두 바뀌었다. 숙소 예약은 모두 취소됐고, 이동경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변경됐다. 만나는 취재원들은 모두 가명을 썼고, 사진 촬영은 철저히 통제됐다. 수시로 전파감지기를 꺼내 도청이 없는지 확인해야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북한 지하교인의 생존과 필자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이들은 철저하게 點組織(점조직) 형태로 연결돼 자신과 구성원들을 보호했다. ‘대북 선교’는 이들에게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全 취재일정 취소”
10월 ○일 오후 4시30분, 중국 옌지 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은 초가을인데, 옌지는 이미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여름 옷만 몇 벌 가지고 왔는데, 새벽이면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결국 두툼한 외투부터 한 벌 사 입어야 했다.
옌지의 첫인상은 날씨처럼 ‘스산함’ 그 자체였다. 취재 전 전달 받은 예상 일정은 출입국 날짜와 공항에서 찾아야 할 영문 이니셜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바뀌기 일쑤였다. 공항에 마중 나온 조선족 청년 리철혁(가명)씨는 필자에 대한 정보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도 “오후 4시에 공항으로 가 ‘M○○’란 팻말을 들고 있으라”는 내용만 그날 아침에 전달 받았다고 한다. 옌지에서 첫날 일정이 시작되는 줄 알았는데, 리씨는 필자를 차에 태우더니 곧바로 ○○시로 이동했다.
○○시에 도착, 한 호텔 앞에 차를 세우자, 바로 옆에 주차해 있던 차에서 사람들이 내렸다. 한국에서 미리 연락이 됐던 ‘金(김) 회장’과 ‘李(이) 사장’이었다. 옌지의 숙소에 예약을 취소하려고 전화기를 들자, ‘김 회장’이 급히 손을 잡고 막았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안’입니다. 아마 국제 로밍이 돼있을 텐데, 추적당할 수 있습니다. 일단 이 전화를 사용하시죠. 그리고 여기 오기 전 계획했던 일정은 모두 취소됐습니다.”
그날 밤 필자와 일행은 세 명의 조선족을 만났다. 모두 북한을 오가며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로, 갈 때마다 한국에서 받은 ‘물자’들을 ‘배달’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물자’들은 쌀, 과자, 신발, 비누, 의약품 등 북한 주민들에게 꼭 필요한 생필품들이다. 가장 중요한 배달 물품은 ‘성경’이다. 정식으로 가져갈 경우 세관에서 바로 압수되기 때문에, ‘비공식적’으로 入北(입북)할 때 주로 배달된다. ‘비공식’이란 몰래 강을 건너 북한으로 넘어가는 밀입국을 말한다.
‘姜(강) 선생’으로 불리는 한 조선족이 ‘김 회장’에게 보고를 시작했다.
강 선생: “함경남도 ○○읍에 ‘洪(홍) 목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60대 후반이고,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안수를 받았죠. 같이 돕는 ○○씨와 ○○씨는 모두 50대 후반으로, 이들의 부모 세대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았습니다.”
김 회장: “홍 목사와 함께 예배 드린 적이 있습니까.”
강 선생: “예. ○○읍에서 비밀리에 예배 드리는 것을 봤고, 함경북도 ○○시에 갔을 땐 함께 예배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김 회장: “어떤 형식으로 예배를 드리던가요.”
강 선생: “○○읍에선 식사 시간에 소규모 단위로 모여 조용히 예배를 드립니다. ○○시에선 밤에 바닥에 누워 천장을 보며 함께 찬송과 성경을 봉독했습니다. 홍 목사는 성경을 거의 외우다시피 합니다. 그날도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7장 내용을 가지고 설교했는데, 중국으로 돌아와서 확인해 보니 정확하게 외우고 있더군요. 다만 문장은 많이 달랐습니다. 아마 해방 전에 사용되던 성경 문장 같아요.”
김 회장: “지금까지 어떤 지원을 했고, 앞으로 어떤 지원을 해야 할까요.”
강 선생: “지난 10년간 제가 여러 차례 식량과 물품을 전해줬지만, 홍 목사는 항상 사양하다가 겨우 받습니다. 그는 먹을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성경을 보내달라고 합니다.”
한 시간에 걸쳐 진행된 회의 후 그들은 홍 목사에게 의약품과 성경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또 건강 상태가 심각한 홍 목사를 직접 중국으로 데리고 나와 의료 지원을 비밀리에 추진하기로 했다.
“…가 죽어야 우리가 살지”
강 선생은 자신이 직접 지원해온 북한의 여러 지하교인들을 소개했다.
“함경북도 ○○에 두 가정이 있습니다. 각각 4명과 6명으로 가족끼리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바로 옆인 ○○에도 두 가정이 있고요. 조금 전 말한 홍 목사가 있는 ○○읍엔 제가 아는 신자만 20명이 넘습니다. 그 외에도 함경남북도 각 지역에 한두 가정씩 돕고 있어요.”
―북한의 지하교인 신자 수가 얼마나 될 것으로 예측합니까.
“제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통계를 내는 것도 아니고, 그분들이 워낙 비밀리에 전파되고 있어서 그 수를 알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외국인’인 제가 직접 접촉하는 지하교인만 200명이 넘는다는 사실입니다.”
―함경도의 최근 동향은 어떤가요.
“정말 이젠 끝까지 간 느낌이에요. 워낙 중국과의 왕래가 잦기 때문에, 정보가 금방 들어옵니다. 이젠 대놓고 ‘…가 죽어야 우리가 살지’, ‘…가 빨리 없어져야 해’라고 합니다. 서로 앞의 주어는 생략하지만, 누구인지는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20년 넘게 북한을 드나드는데, 예전엔 절대 불가능한 대화였죠.”
강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 내부는 현재 불확실한 정보들이 서로 비밀스럽게 전파돼 다양한 루머들이 생산되고 있다고 한다. 그는 “金正日(김정일) 사망설, 평양에서의 內戰(내전)설, 가짜 김정일설 등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소문이 무성하다”며 “중국과 남한을 통해 들어온 소식이 와전된 사례도 많다”고 했다.
함께 자리한 ‘李(이) 선생’은 1990년부터 대북 선교활동을 해왔다. 그는 직접 북한 북부 지역을 돌며 성경을 가르쳤다고 한다.
“1990년 무렵만 해도 물 떠놓고 손 모아 비는 기독교 신자가 있었습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기는 했는데, 기독교를 그저 祈福(기복)의 종교로만 이해한 거죠. 그런 분들 서너 명씩 모아 산에 올라가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최근 지하교회의 예배 방식은 남한 교회의 ‘열린 예배’ 방식과 비슷해졌다고 한다. 이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예배가 사도신경 고백―대표자 기도―성경 통독―소감 발표―주기도문 순서로 진행된다.
조직 구성은 남한 교회의 ‘구역’과 개념이 비슷하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발각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최대한 작은 규모로 예배 모임을 갖는다. 그리고 구역 지도자끼리 한 달에 한 번 정도 모임을 따로 가진다.
“워낙 비밀리에 전파되고 있기 때문에, 예배 방식이나 조직 구성이 지역마다 크게 다릅니다. 얼마 전 한 지도자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15명이 함께 예배 드리고 헤어졌다고 보고하는 겁니다. 깜짝 놀라서, 다시는 그렇게 모이지 말라고 했죠.”
軍·보위부 타깃 ‘전략적 선교’
최근 북한의 특권층들에 대한 선교가 확대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모인 조선족 선교사들은 한목소리로 최근 軍(군) 장교나 국가안전보위부 요원 등 북한 주요 인사로부터 성경 요청이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 조선족 선교사의 증언이다.
“우리가 성경과 함께 기독교 영화 CD도 함께 보급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낸 것 중 50장이 군대로 갔습니다. 서로 돌아가면서 보다가 자꾸 필요하니까 더 달라고 하는 거죠. 뭔가를 몰래 하는 것은 바깥보다 군 내부가 오히려 편할 수가 있어요.”
보위부의 경우 지하교인 수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기독교 관련 자료들을 접하게 된다. 북한은 이미 상당수의 성경을 압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 랴오닝성의 접경 지역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선교사 朴(박)모씨는 북한의 한 道(도)에서만 약 8만권의 성경이 압수됐다고 주장했다.
“제가 직접 북한 내부의 한 유력 인사를 통해 확인한 결과입니다. 어느 도라고 밝힐 수는 없지만, 자체 조사 결과 약 34%의 도민이 ‘기독교를 접했다’는 통계가 나왔다고 해요. 실제로는 훨씬 더 되겠죠.”
―한 도에서 34%라면 믿기 어려운 숫자인데요.
“정확한 통계입니다. 그 도에선 중국에 다녀온 사람이 50% 이상입니다. 절반 이상의 주민이 ‘탈북’ 또는 ‘出國(출국)’을 했다는 의미인데, 충분히 가능한 결과입니다.”
북한 핵심 세력을 목표로 한 선교는 보다 치밀한 준비를 필요로 한다. 보위부에서 2중 첩자를 보내 선교활동 자금을 받아 가고 지하교인을 색출하기 때문이다. 在中(재중) 선교사 박씨의 증언이다.
“보위부의 지령을 받은 가짜 탈북자들이 중국으로 와서 성경공부를 이유로 우리에게 접근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선교에 필요한 돈을 받아서 보위부로 빼돌린 다음, 진짜 비밀 지하교회 조직 명단을 확보해 그들을 체포하는 것입니다.”
박씨는 “이들의 작전은 역효과를 불러오는 경우가 있다”면서 “보위부 요원들이 ‘진짜’ 지하교인화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성경을 함께 공부하던 젊은 탈북자 친구가 하루는 제게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저희는 느낌이 대충 옵니다. 이유가 셋 중 하나거든요. 첫째, 남한이나 동남아 국가로 가고 싶다. 둘째, 이성관계 상담. 셋째, 자신이 사실은 정부 관계자다. 그 친구는 세 번째였습니다.”
―실제로 그렇다면 위험한 상황 아닙니까.
“제가 먼저 당당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정부 관계자는 내가 수없이 만나 왔다. 할 말 있으면 하라’고. 그러자 이 친구가 명단을 내놓습니다. 중국에 있는 탈북자와 남한조선족 선교사들의 명단이었죠. 계획적으로 제게 접근했던 겁니다.”
박씨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 보위부 요원이었던 ○○씨는 계획적인 접근을 시작했지만, 6개월 동안 성경공부를 하면서 마음을 돌렸다. ○○씨는 선교사 박씨에게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내가 예수쟁이들을 잡으러 이곳에 왔지만, 직접 접해 보고 너무 놀랐습니다. 全(전) 조선 땅에서 이렇게 따뜻하고 진실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너무나 많은 것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한국 선교사들과 북한 정부는 그야말로 ‘선교 전쟁’ 중이었다. 박씨는 보위부 요원과 함께 군 장교, 방송국 고위 간부의 자녀 등 수많은 고위층 인사들이 선교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긴 시간이 소요됩니다. 처음 3개월은 그냥 건성으로 대답하고 배웁니다. 배가 고파 왔으니 일단 먹고 보자는 것이죠. 하지만 그러다 진정한 진리를 깨닫게 되고, 조국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을 갖게 됩니다. 결국 북한 정권을
비밀 接線 현장
10월 ○일 오전 7시, 아침 식사를 위해 한 식당을 찾았다. 함께 식사하기로 약속한 김 회장과 이 사장은 아직 도착 전이었다. 맞은편 테이블에 한 중년의 외국인이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우연히 그의 통화를 엿들었는데, 내용은 주로 북한의 기독교 가정을 돕기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는 내용이었다. 잠시 후 도착한 김 회장이 그 외국인을 반갑게 맞으며 필자에게 소개했다.
“이분은 저희 단체에 재정 문제를 도와주고 있는 D씨입니다. 미국인으로, 현재 국제적인 식품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죠.”
소개를 마친 후 이들은 북한 내부의 주민들에 대한 지원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김 회장은 최근 자신이 직접 다녀온 북한의 동향을 설명했고, D씨는 여러 방식의 지원 방법을 제안했다.
D씨는 북한에서 구해온 ‘조선행정구역도’를 펼쳐 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선인민군지도출판사에서 발행한 지도로, 지도 위편엔 ‘조선 인민의 철천지 원쑤인 미제 침략자들을 소멸하라!’란 글귀가 적혀 있었다. 다행히 D씨는 한글을 읽지 못했다.
오후엔 D씨와 함께 두만강 접경지대를 찾았다. ‘凉水鎭(양수진)’이란 지역에 이르자 끊어진 다리 하나가 나타났다. 일명 ‘穩城斷橋(온성단교)’라고 불리는 곳으로, 일본군이 패망 직전 파괴한 것으로 전해진다. 두만강 건너 북한 온성군이 보였다. 다리 아래로 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깊어 보이진 않았다. 워낙 가까운 곳이라, 겨울이 되면 수많은 북한 주민들이 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온다고 한다.
끊어진 다리 끝에 서서 동편을 바라보니 멀리 높은 탑이 우뚝 서 있었다. 金日成(김일성)의 항일투쟁을 기념해 지어진 ‘왕재산 대기념비’다. 밤이 되면 강 건너엔 불빛 하나 보이지 않지만, 기념비 꼭대기에 위치한 횃불은 크게 타오르고 있다.
조선족 청년 리철혁(가명)씨는 “한쪽은 저렇게 캄캄한데, 저 횃불은 끝까지 타오르는 이곳이 바로 북한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현장”이라고 했다.
“북한 주민들은 어둠 속에서 계속 죽어가고 있지만, 김일성을 기념하는 횃불이 저렇게 활활 잘 타오르고 있네요. 역사의 비극이자 저주입니다.”
끊어진 다리를 떠나 한참을 달리던 중, 이 사장이 갑자기 차를 세웠다.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차에서 내렸다. 화장실이 급한 줄로만 알았는데, 잠시 후 차 뒤쪽을 보니 길 건너 편에 서 있는 차에서 내린 한 남자와 대화 중이었다. 무슨 일이냐는 필자의 질문에 김 회장이 짧게 대답했다.
“접선. 문 열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
왕복 2차로 도로 양편에 서로 차가 세워져 있고, 한쪽 차에서 박스 몇 개가 내려졌다. 그 중 일부가 필자가 타고 있던 차에 실렸다. 북한으로 전해질 ‘물자’가 배분되는 순간이다. 그들은 물자를 전달한 후, 이 사장에게 몇 가지 정보를 알려주고 곧바로 사라졌다. 접선 소요 시간은 3분 정도였다.
그날 저녁, 이 사장은 접선 과정에서 입수한 북한의 내부 동향을 필자에게 알려줬다. 최근 평양에서 일어난 북한 핵심층들의 권력다툼과 김정일의 건강 상태 등이었다. 확실한 증거가 없어 확인은 불가능했지만, 꽤 신빙성이 있는 정보였다.
조선족 선교사 “내가 직접 가르친 지하교인만 300명 넘어”
10월 ○일 오후 3시40분, 지린성의 한 호텔 앞에서 우리는 택시에 올랐다. 행선지는 비밀에 부쳐졌다. 바로 북한 지하교인들이 탈북해 머무르고 있는 在(재)중국 북한 지하교회였기 때문이다.
‘金(김) 선생’이라 불리는 30대 여성이 동행했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까지 만나 온 탈북자들과 북한 지하교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필자에게 들려줬다.
“탈북자를 돕다가 북한 보위부의 조사도 받고 중국 감옥에도 갇혔습니다. 그렇게 당하고 나니 더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이젠 그 무엇도 두렵지 않습니다. 죽으면 죽는다는 마음으로 이 사역을 계속할 거예요.”
김씨는 탈북 또는 중국을 방문한 북한 지하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서 다시 북한으로 보내는 조선족 선교사로, 2000년경부터 탈북자 지원 사역을 시작했다. 어릴 적 할아버지의 신앙을 이어받은 그녀는 거의 매일같이 북한을 드나들었다. 친척이 있는 곳은 모두 돌았고, 친척이 없으면 자신이 중국에서 가르쳤던 지하교인에게 연락해 가짜 등기를 등록하게 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이 가르친 탈북 지하교인만 300명이 넘는다고 했다. 직접 명단을 작성해 ‘관리’한 인원이 그 정도고, 지나가며 도운 사람은 수천 명에 이른다고 한다.
“몇 달 전 한 중국 남자가 제가 돌봐줬던 북한 여성을 데리고 저희 집에 들이닥쳤어요. 인신매매를 한 것 같은데, 다짜고짜 저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렸습니다. 저희 남편은 어리둥절해서 정신을 못 차렸고, 결국 제가 ‘너도 나도 같이 감옥 가자’며 맞섰죠.”
3년 전에는 북한을 방문했다 보위부에 잡혀 곤욕을 치렀다. 이미 그녀에 대한 정보가 북한에 있어 한 달 내내 조사를 받아야 했다. 조사 내용은 “왜 성경을 가르치는지”, “언제 어디서 모이는지”, “몇 명의 북한 기독교인을 관리하고 있는지”, “지하교회가 어디에 있는지” 등이었다고 한다.
“보위부 사람이 절 보자마자 책상을 내리치며 ‘아줌마! 정신 있어?’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처음엔 당황도 되고 겁도 났죠.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그냥 귀 막고 기도만 했습니다.”
오전 7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 종일 계속된 조사는 그녀의 힘을 다 빼놓았다. 보위부 건물 밖에선 그녀의 ‘제자’ 5~6명이 매일 진을 치고 기다렸다. 보위부 요원들이 쫓아내려고 했지만 그들은 “조사 방해 안 하고 그냥 밖에 서 있겠다”며 버텼다고 한다.
한 할아버지는 김씨를 위해 직접 콩죽을 만들어 왔다. 첫날부터 다른 제자들과 함께 김씨를 쫓아다녔지만, 그녀가 “위험하니 제발 멀리 있으라”고 간청해서 매일 100m쯤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결국 마지막 조사를 받고 떠나는 날, ‘김 선생 쓰러질까 싶어’ 직접 콩죽을 들고 찾아온 것이다.
마을잔치 후 15명 모여 비밀예배
2007년 ○월 ○일, 갑자기 사복을 입은 공안 10여명이 김씨 집에 들이닥쳤다. 非法入境者(비법입경자·탈북자)를 도왔다는 죄명이었다. 이미 소문이 날 만큼 크게 했던 활동인지라, 별수 없이 잡혀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년형을 받고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의 한 형무소에 갇혔지만, 우여곡절 끝에 형기를 앞당겨 나올 수 있었다.
“감옥에 들어가서도 동포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얼마 전 옥중 동료였던 한 분이 출소해 직접 인사를 전하러 왔더군요. 지금은 열정적인 기독교 신자가 됐습니다.”
20년째 선교 활동을 해오고 있는 조선족 선교사 이 선생은 북한의 한 마을 잔치에 다녀온 일화를 전했다.
“작년 중국 접경 지대의 한 마을을 찾아갔습니다. 지하교인 분들과는 이미 이야기가 돼 있었지만, 다른 마을 주민들은 그저 중국에서 온 손님인 줄로만 알았죠. 북한에선 개 한 마리가 80원 정도 하더군요. 가서 보신탕을 해먹었는데, 북한 분들이 워낙 못 먹고 지내서 그런지 제대로 넘기지를 못했습니다. 속에서 받아주질 않는다며 반 사발 먹고 모두 남겼습니다.”
결국 250원짜리 노루 한 마리를 사왔다. 기름기 없는 고기를 골라 육회로 먹었다. 보신탕은 느끼해서 못 먹던 주민들이 그릇을 다 비웠다고 한다. 잔치가 끝난 후 주민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정리를 한다는 이유로 15명이 남았다. ‘정리’는 핑계였고, 실제 목적은 ‘예배’였다. 이씨의 아내가 망을 보고, 15명이 한자리에 모여 기도했다. 이씨는 당시 예배 광경을 이렇게 회상했다.
“정말 뜨겁게 기도하고 찬양했습니다. 새벽부터 찾아온 사람들이 서로 떠나기 싫어 웃고 울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소원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저 배불리 먹는 것도, 민족의 위대한 통일도 아닙니다. 다만 마음 놓고 예배 한 번 드리는 것이죠. 그것이 그들에겐 바로 천국입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듣는 동안, 필자가 탄 택시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중국 동북부의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었다. 장터에서 탈북자들을 위해 사과 두 박스를 50위안(약 9000원)에 샀다.
약 10분 동안 비포장길을 달려 한 시골집에 도착했다. 마당에 탈북자로 보이는 세 청년이 보였다. 두 명은 커다란 천을 접고 있었고, 한 명은 메마른 짚단을 들어 옮기고 있었다. 방 안에서 한 중년남자가 나오자 김 선생이 반갑게 인사했다.
“송 사장님, 김 선생입니다. 잘 지내셨죠? ○○ 할아버지 건강 어떤지 보러 왔어요.”
○○ 할아버지는 기독교인인 손녀 姜(강)○○씨를 따라 이곳을 찾아온 탈북자다. 肝(간) 상태가 심하게 좋지 않아, 당장 치료가 필요했다. 김 회장은 우선 강씨의 손을 붙잡고 기도부터 하기 시작했다. 메마른 강씨의 눈이 어느새 촉촉이 젖어 있었다.
탈북자들을 보호하고 있는 조선족 사업가 송씨는 처음엔 탈북자들을 도울 생각보다는 그들의 싼 인건비를 이용하겠다는 의도가 더 컸다고 한다. 그러나 몇 해 동안 탈북자들과 동고동락하며 지내온 그는 이제 지하교회 운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됐다.
20분 동안 김 회장과 송 사장은 강씨를 놓고 대책을 논의했다. 최대한 빨리 한국인 의사를 섭외해 치료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강씨 마을을 오가는 ‘지도자’들을 통해 의약품과 식량을 전달하기로 했다.
‘움막교회’ 최초 공개
짧은 일정을 마친 우리는 곧바로 차에 올랐다. 산속에 있는 비밀 움막교회로 가기 위해서다. 이들이 중국 공안이나 북한 보위부에 적발되는 ‘사고’를 당했을 때 피하는 곳으로, 외부 노출이 철저하게 금지된 곳이었다. 김 회장은 각별히 보안에 주의해 줄 것을 당부했다.
“지하교회를 지원하기 위해 지어진 움막이 언론에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최초입니다.”
20여분 산길을 달리자 작은 나무 울타리가 나왔다. 그곳부터는 차가 들어갈 수 없어 내려서 걸어야 했다. 차에서 내리던 김 선생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 이곳에 올 것이라 전혀 예상을 못해 높은 구두를 신고 왔네요. 워낙 이 조직이 비밀스럽게 움직이기 때문에, 항상 이런 식이랍니다.”
한참을 걸어 올라갔다. 고요한 가운데 저 멀리 물 흐르는 소리와 꿩 울음 소리가 들려온다. 주변 몇 km는 사람이 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작은 집 한 채가 나왔다.
“이곳에서부터는 저도 처음입니다. 조금 전 송 사장님 말대로라면 여기서 100m쯤 올라가서 우측 길이 나오면 30m 전방에 소나무 숲이 보인다고 하네요. 움막은 그 사이에 있다고 합니다.”
송 사장의 말대로라면 5분 안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한 시간을 헤매야 했다. 그만큼 움막은 비밀스러운 곳에 철저히 숨겨져 있었다.
통화권은 이미 훨씬 벗어나 있었고, 우리는 이미 메말라 가는 나무들을 헤치며 길을 찾고 또 찾았다. 산속이라 해가 빨리 졌다. 겨우 5시인데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전등을 켜야 주변이 보일 때쯤 겨우 움막을 찾을 수 있었다. 그곳을 홀로 지키고 있던 탈북자 할아버지는 草(초)담배에 불을 붙인 후에야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는 이미 탈북 과정에서 세 차례나 적발돼 온갖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할아버지와 대화를 마친 김 선생이 움막에 대해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지난 봄에 ‘사고(공안 적발)’를 피해 송 사장네 식구들이 몇 달 동안 머물렀던 곳입니다. 11명이 이곳에 있었죠. 그중 네 명은 중국에 남았고, 일곱 명은 북으로 돌아갔습니다. 몇 주 동안 이곳에서 함께 기도하고 예배 드렸죠.”
―산속에 있는 움막이라 마음 놓고 모임을 가질 수 있겠습니다.
“예. 이곳에선 온 성도들이 크게 목소리 높여 기도하고 찬양을 합니다. 북한 지하교인들에겐 이곳이 곧 천국이죠.”
―주변에 아무 것도 없는데, 식량이나 생필품은 어떻게 지원합니까.
“조금 전 갔었던 송 사장 집에서 모두 보내 옵니다. 오늘은 좀 헤매긴 했지만, 실제론 그리 멀지 않아요.”
―내부가 꽤 넓어 보이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머무를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가장 많은 인원이 모인 것은 20명 정도입니다.”
김 선생과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할아버지는 계속 안절부절 못한 채 담배만 태우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낯선 사람들이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했다. 취재를 마치고 산을 내려오기 전에 필요한 것 없느냐고 물었다.
“송 사장한테 돼지 먹거리나 좀 보내 달라고 전해줘.”
지하교회 지도자와의 만남
10월 ○일 오전 10시,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의 한 식당에서 화교 출신 북한 지하교인(북한에서 태어난 화교)인 李모(가명)씨를 만났다. 39세의 그는 필자에게 “조선에서 죽어가는 동포들을 살리겠다는 사명감으로 글을 써 준다면 취재에 응하겠다”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대화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그의 눈엔 눈물이 가득 맺혔다.
“저는 정말 벌레보다 못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돈이 최고인 줄 알았고, 그저 나 혼자만 살자고 온갖 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긴 지금 이 순간 제 영혼은 그 어느 때보다 평안합니다.”
6~7년 전 탈북해 중국 옌지(延吉)에 정착한 그는 사업을 시작해 2년 동안 큰 돈을 벌었다. 중국에서 탈북자 여성을 만나 결혼했고, 수많은 친구들과 동료들을 만났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도 잠시, 2004년 겨울 그는 한 중국인으로부터 ‘협작(사기)’을 당했다. 집만 남겨놓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이곳 저곳을 헤매다 그가 정착한 곳은 교회. 신앙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외국인의 교류가 많아 돈벌이가 되겠다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는 계속 가난에 찌들었고, 결국 친구들도 잃었다.
그러던 중 지린성(吉林省) ○○의 한 교회에서 ‘진짜 믿음’을 갖게 됐다. 성경을 공부하다 신앙에 눈을 뜬 그는 더 깊은 공부를 하기 위해 조선족 신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몇 달 후, 탈북자 신분이 탄로나 신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그는 계속 신앙의 끈을 놓지 않았고, 인근의 교회에서 아내와 함께 북한 선교 활동을 계속했다. 2005년 말 부부는 결국 조선行(행)을 결정한다.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치밀한 준비를 했고 때를 기다렸다.
얼마 후 결단의 날이 왔고 이씨 부부는 중국 접경의 한 마을을 찾았다. 오후 3시쯤 아내가 먼저 강을 건넜다. 5시간 후엔 지원 물자를 보냈다. 그리고 자신의 渡江(도강) 시간을 기다리던 중, 새벽 1시쯤 전화가 걸려 왔다. 아내가 붙잡혔다는 전갈과 함께 그도 빨리 피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씨는 선양의 피신처에 도착하자마자 入北(입북) 준비를 서둘렀다. 한 달 후, 그는 다시 두만강으로 왔다. 계절은 봄이었지만 날씨는 여전히 쌀쌀했다. 솜바지를 입은 채 갈대밭을 지나 강을 건넜다.
뒤편으로 큰 건물이 보였다. 그가 발걸음을 옮기는 정면에 초소 경비병이 보였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미 아내가 붙잡힌 뒤라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그날 중국과 북한의 초소 사이를 통해 도강했다.
“네가 믿는 예수한테 구원해 달라고 해봐!”
강은 무사히 건넜지만, 한 마을에서 중국 돈을 바꾸다 적발된 그는 안전부를 거쳐 道(도) 집결소로 옮겨졌다. 그는 “집결소에서 ‘생지옥’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그곳은 사람이 사람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강냉이 대충 갈아서 나오는 식사는 며칠 동안 입에도 못 댔습니다. 넋이 나간 한 여성은 ‘살아야 또 중국 간다’면서 저에게 식사를 권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도 기독교 신자더군요. 중국서 교회를 갔는데 친구가 신고했다고 합니다.”
그는 한 여성 수감자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집단 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청소를 하다가 방에서 면도칼이 나왔어요.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창틀에 올려뒀는데, 간수들이 왜 ‘바치지 않았냐’며 집단 폭행을 했죠. 남자 네 명이 여자 하나를 던져놓고 마구 밟았습니다. 한 간수가 소리쳤어요. ‘네가 믿는 예수가 있으면 어서 구원해 달라고 해봐!’”
우여곡절 끝에 처참한 감옥 생활을 마친 그는 탈북 전에 살던 자기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내는 찾을 수 없었다. 2007년 봄, 한 60대 할머니가 그를 찾아왔다. 그의 아내와 함께 탈북자 감옥소에 수용됐던 사람이었다. 출소될 당시, 이씨의 아내가 꼭 가 봐 달라고 신신당부해서 왔는데, 남편 집인 줄은 몰랐다고 한다.
그녀는 그의 아내를 ‘천사’라고 불렀다. 60년 넘는 세월을 살았지만 그런 여자는 처음 봤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말은 잔인했다.
“내가 나올 땐 살아는 있었는데, 지금쯤은 분명 죽었을 거야. 그곳은 도저히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그만 아내를 잊게.”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지만 이씨는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을 찾아온 할머니도 알고 보니 지하교회 신자였다. 그날부터 그는 마을을 다니며 비밀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17명의 지하 성도들이 조직됐고, 그는 중국을 오가며 물자를 전달하고 있다. 그가 북한에서 태어난 화교 출신이어서 다른 주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감시가 덜한 편이기 때문에 중국을 나다닐 수 있다고 한다.
“그때 할머니가 그러더군요. ‘우리가 기도하고 있고, 전 세계가 기도하고 있다’고. 그 말 하나로 전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기적이에요.”
그는 한 달여 동안 중국에서 성경 공부를 한 후 다시 북한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를 돕던 한국인 선교사 ‘趙(조) 선생’은 그를 위해 MP3 성경과 노트북을 준비했다. 조 선생은 “다음 중국 일정 때는 지하교인 한 명을 더 데리고 나와서 지도자 교육을 받으라”고 했고, 이씨는 “여성 신도 한 명을 데리고 나오겠다”고 답했다.
“형제님, 무엇보다 남한의 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저는 북한에서 나오는 기도가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한 교회가 다시 회개해야 합니다.
북한을 향한 가장 강력한 햇볕
중국-북한 접경은 20년 가까이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들은 총칼 대신 성경과 식량을 들었고, ‘神(신)의 이름’으로 북한 전 지역을 융단폭격하고 있다. 취재에 동행했던 김 회장은 “현재 북한의 가장 큰 主敵(주적)은 미국도 남한도 아닌 바로 ‘예수쟁이들’이라며 “북한 정권은 결국 ‘예수쟁이들’에 의해 무너질 것”이라고 했다.
지난 60여년간 북한을 지켜 온 큰 기둥은 ‘수령의 유일적 영도체제’와 ‘주체사상’이었다. 10년 전 黃長燁(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망명을 통해 주체사상은 사실상 무너졌고, 현재 김정일의 지배체제만이 북한을 지탱하고 있다. 김 회장의 말이다.
“그 불안한 체제를 기독교가 뒤흔들고 있습니다. 수많은 탈북자들이 ‘주체사상에서 김일성 대신 하나님을 넣으면 가장 잘 이해가 된다’고 합니다. 실제 미국의 한 종교관련 통계사이트는 지난해 북한의 주체사상을 세계 10번째 종교로 발표한 바 있죠.”
지난 9월 19일, 미국 국무부는 북한을 종교자유탄압 ‘특별관심국(CPC)’으로 지정했다. 2001년 이래 8년째다. 중국, 미얀마(버마), 이란, 수단, 에리트레아(아프리카 북동부), 사우디아라비아, 우즈베키스탄이 북한과 함께 지정됐다.
지난 10월 2일 군사실무회담을 먼저 제의한 북한 대표가 개성공단 폐쇄까지 들먹이며 ‘삐라(전단)’ 문제를 중점적으로 거론해 관심을 모았다. 대북 전문가들은 “하늘에서 대량으로 뿌려지는 자유와 번영의 소식들이 미국 미사일보다 더 큰 위협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현재 남한과 중국에서 가장 활발한 ‘삐라 활동’을 하고 있는 곳은 모두 기독교 단체들이다. 李民馥(이민복) 기독북한인연합 대표는 1995년 탈북난민 1호로 남한에 온 후 수년째 자신이 직접 개발한 장치로 대형 풍선을 날리고 있다. 그가 보내는 삐라에는 북한 정권의 허구성과 함께 기독교 복음에 대한 내용들이 가득하다.
휴전선과 함께 중국 접경지역에서도 꾸준히 삐라가 보내지고 있다. 실제 한 탈북자는 함경북도에서 신약성경 ‘마가복음’書(서)가 인쇄된 풍선 삐라를 본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랴오닝성 ○○시에서 만난 한 한국인 선교사의 말이다.
“저는 북한 지하교회 선교가 진정한 ‘햇볕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10년 동안 정부에서 했던 정책은 ‘햇볕’ 아니라 ‘땡볕’이었죠. 지금 꽉 막힌 북한을 뚫는 가장 강력한 ‘햇볕’은 바로 ‘복음’입니다. 지금 북한의 지하는 기독교의 불길로 펄펄 끓어오르고 있어요. 화산 같이 폭발할 때가 멀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북한 '지하교회'에서 올린 예배
在中 북한 선교사의 비밀수기
[2005-06-01 16:42 ]
혜옥이의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의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병원을 운영하시면서 교회를 개척하셨다고 합니다.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복음을 전하겠다고 그대로 북한에 남아계셨습니다.
북한에도 비밀교회와 성도들 있어
전쟁 이후 북한은 종교말살 정책에 돌입하였고, 급기야 1958년에 정치개혁을 하면서 종교의 자유를 완전히 제거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지하교회 모임을 계속 꾸려가셨다고 합니다. 비밀을 유지하며 조심스럽게 모임을 가졌지만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결국 북한 당국에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중형을 선고 받고 감옥에서 심한 고문과 노동에 시달리다가 병보석으로 풀려 나셨다고 합니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허약한 몸을 이끌고 비밀리에 복음을 전파하시다 두 번째 옥고를 치루게 되셨고 끝내 고문후유증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혜옥이 어머니께 단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애야 내가 다하지 못한 하나님의 일을 네가 해야 한다.”
이때부터 반동가족으로 낙인 찍힌 혜옥이 가족들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언제나 어머니는 “혜옥아 우리는 슬퍼도, 가난해도 감사해야 한다. 이런 고생과 가난이 모두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이란다.”라는 말로 칭얼대는 혜옥이를 달래며 키우셨다고 합니다.
혜옥이가 성장하면서 복음 전하는 어머니의 일을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에서 복음을 전하다 보면 언제나 배신의 위험이 뒤따릅니다. 동네사람의 고발 때문에 혜옥이도 위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을 머금고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지혜로운 혜옥이는 스스로 저희들을 찾아왔습니다.
저희들 교회에 머물게 된 혜옥이는 주변의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수 차례 어머니께 중국행을 권했지만 혜옥이 어머니는 끝내 거부하셨습니다.
“혜옥아! 주님은 여기 북조선에도 있다. 그러니 나는 여기에서 복음을 전해야겠다. 여기의 성도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구나. 네 한 몸 무사하다니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
혜옥이가 어머니로부터 받은 마지막 편지 구절입니다.
북한에서 58명의 성도들과 비밀예배
2002년 9월의 어느 날 저는 처음으로 북한땅을 밟았습니다. 제가 북한에 들어간 것을 연락 받은 성도들을 만나 함께 성경을 읽었습니다. 낮은 목소리지만 성도들과 함께 찬양을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 찬양~예수님 찬양~”
언제 배웠는지 손과 몸을 움직이는 율동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선생님, 한 달에 한번씩이라도 와 주시라요! 오시면 우리래 이렇게 말씀을 읽고 례배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저는 6인의 성도들과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몇 년이 지난 지금은 6개 지역의 교회에서 58명의 성도들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00지역에서는 성도 26명이 함께 모여 예배의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습니다. 언제나 성도들은 “자주 와달라!”고 요청합니다. 항상 대답에 앞서 눈물이 떨어집니다.
이제 북녘땅에도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곁에 머물기 위해서는 가장 끔찍한 고통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야 합니다. 은혜로운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고 계신 것 입니다.
지금 북한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열리고 있습니다.
디모테 / 모퉁이돌 선교회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의 신앙
"환란과 핍박중에도 성도는 신앙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옥중에 메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얻었네 우리도 고난받으면 죽어도 영광되도다"
멀리서 찍어서 초점이 흐린데,
자세히 보시면 핸드백과 치마 색깔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스니다.
핸드백도 은근 명품틱하고...
평양에서 밝은색 정장을 입은 여성을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안에 밝은색 원피스를 입고
체크무늬 핸드백을 메고 있네요.
평양 여성 중에
외출복으로 바지를 입는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바지는 대부분 작업복이죠.
외출복은 한복이나 치마정장인데, 드문 경우입니다.
롱코트가 인상적이네요.
구두 굽도 제법 있고.
구두와 핸드백 색깔이 같네요.
어딘가 바삐 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평양 여성들은
날씨에 비해서 옷을 가볍게 입고 다녔습니다.
제법 큰 핸드백이네요.
뒤쪽에 있는 엄마의 포대기 모양이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기저귀 가방도 제법 칼라풀하고...
체크무늬 치마와 검은 운동화
살짝,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ㅋㅋ
전형적인 평양 여성의 정장차림입니다.
단색 원피스에 굽 낮은 구두, 심플한 디자인의 핸드백.
퍼머머리 여성은 대부분 묶고 다닙니다.
안내원은 머리를 풀고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양의 젊은 여성들.
두 여성은 굽이 제법 있네요.
서로 라이벌인가 봅니다. ㅋㅋ
어두운 색 정장과 밝은 색 정장의 대조적인 모습으로
역시 전형적인 평양 여성의 모습입니다.
오른쪽 여성이 좀더 멋을 부리는 스타일인 것 같습니다.
정장 색도 밝고, 핸드백도 밝고, 굽도 높고,
디카로 사진을 찍고 동생과 사진을 확인하고 있는
젊은 평양 여성의 모습을 찍었습니다.
주변의 아주머니들 패션이, 약간 구수하다는....
평양에서 본 멋쟁이 커플입니다.
짧은 치마, 긴 양말, 머리띠...
예사롭지 않네요.
역시 평양 멋쟁이 커플 사진입니다.
여성의 양산이 인상적입니다.
드물게 바지 정장을 입었고...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리네요.
아이들과 함께 외출한 평양 여성.
이 아주머니처럼 쌕을 메고 다니는 아주머니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쌕을 메고 하교하고 있는 모습.
왼쪽 학생, 스타킹에 굽있는 구두...칼라풀한 가방,
혹시 좀 노는 학생? ㅋㅋ
지난해 말,
언론인 방북단의 일원으로
평양과 묘향산에 다녀왔습니다.
그때 찍은 북한 여성들의 사진 중에서
'트레이닝룩'을 모아 보았습니다.
북한 여성의 패션은 4단계로 나뉩니다.
맨 위가 한복이고
그 다음이 정장이고
그 다음이 트레이닝복이고
마지막이 작업복입니다.
작업복과 정장 사이, 북한 여성들에게 트레이닝복을 편안한 외출복 정도로 입고 있었습니다.
남한에서 '트레이닝룩'이 유행한 적이 있지요,
북한판 '트레이닝룩'으로 해석하면 될 것 같습니다.
북한의 젊은 여성 중에서는 이 '트레이닝룩'을 맵시있게 소화하는 여성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함께 보시죠.
을밀대 올라가는 길에 있는 모란각에서 근무하는 북한 여성입니다.
후드티가 달린 트레이닝복을 맵시있게 소화하고 있습니다. 북한 여성들은 대부분 천소재 트레이닝복을 입으며 이런 면소재 트레이닝복은 드문 경우에 속합니다.
묘향산호텔에서 근무하는 북한 여성이다. 남측 일행 중에 아는 분을 만나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역시 묘향산호텔에서 일하는 북한 여성이 남측 방북단이 찍은 자신의 모습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다.
불고기를 굽기 위해 불을 피우는 장면. 묘향산에서는 이렇게 불을 피우고 불고기를 구워먹을 수 있다.
묘향산호텔직원들이 버스에서 노래 반주에 맞춰 노래를부르고 있다. 호텔이나 음식점에 근무하는 북한 여성들은 대부분 '노래 개인기'를 가지고 있다
양각도호텔에서 근무하는 안소영 동무. 그녀가 입은 빨간 후드 트레이닝복이 가장 맵시가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사진은 찍지 못했다.
묘향산에 나들이나온 여성 중에 트레이닝복을 입은 사람이 많았다.
디자인은 비슷한데 색깔이 다 달랐다.
좀 고전적인 형태의 트레이닝복이다. 일명 츄리닝. 반면 아이가 입은 옷은 칼라풀하다. 북한에서는 아이들의 패션이 가장 화려하다. 부모 마음은 어디나 똑같은 것같다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보는엄마들. 행복해 보인다. 이들 일행도 대부분 트레이닝복을 입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고.
트레이닝복과 상관 없지만 평양에서 본 가장 패셔너블한 커플이어서 한번 올려봤다.
꼬마가 입은 앙증맞은 트레이닝 복.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다. 나들이 나온 북한 할머니들 중에서도 트레이닝복을 입은 분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나시 트레이닝복을 입고 대동강변에서 자전거를 타는 북한 남성. 뒤에 인민대학습당이 보인다.
아빠를 따라 나온 북한 어린이가 입고 있는 트레이닝복. 살짝 나이키필이다.
여자 아이가 트레이닝복을 입고 엄마와 외출을 나가고 있다.
부모를 뒤따라가는 아이 역시 트레이닝복을 입었다.
진짜 트레이닝복을 입고 조깅을 하는 북한 학생들. 평양시내에서 체육관이 많은 지역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아래 사진들은 회의 참석차 평양에 갔을 때 찍은 것들입니다.
공식적으로는 방북 대표단의 일원이었지만,
비공식적으로 저는 '블로거의 눈'으로 북을 보고 와서 누리꾼에게 전하겠다고 했습니다.
평양으로 출발하면서 언론계 선배들에게
'나는 블로거 자격으로 갑니다'라고 말씀 드렸고
북측 언론본부와 만나서도 시사IN 기자라고 소개하고 덧붙여
'인터넷 블로그 <고재열의 독설닷컴> 운영자입니다' 라고 소개했습니다.
블로거의 눈으로 본 관찰기, '블로거가 본 평양'을 연재합니다.
자신들의 모십이 찍힌 화면을 보고 웃고 있는 북한 어린이들. 이번에 북한에서 찍은 사진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이다.
어쩌면 이 모습을 보기 위해서 북한에 갔는지도 모르겠다.
묘향산 호텔 앞에서 촬영했다.
트럭을 타고 한 동네 아이들이 묘향산에 놀러왔다 돌아가는 길인 것 같았다.
엄마들이 묘향산 호텔 화장실에 다녀오는 동안 아이들이 즐겁게 뛰어놀고 있었다.
(북한에는 도로에 휴게소가 없다. 휴게소는 물론 주유소도 없다.)
타임머신을 타고 어린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방북자들은 일반 북한 주민과 접촉하면 안되게 되어 있다.
말을 걸려고 해도 북한 주민들이 피하는 것이 보통이다.
다행히 일행 중 넉살 좋은 분이 있어서 아이들과 어울려 있었다.
슬쩍 나도 가서 사진 몇 컷과 동영상을 건졌다.
만경대 김일성 생가 근처 송산식당 앞에서 찍었다. 이 아이와 엄마처럼,
부모는 무채색 옷을 입고 아이는 유채색 옷을 입은 풍경은
평양 시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주체탑 아래서 찍었다.
잇몸을 드러내면서 환하게 웃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사진을 찍는 우리에게 포즈를 취해 주었다.
드문 경우다.
역시 주체탑 아래서 찍었다.
아이가 아빠와 많이 닮았다.
아이의 운동복이 예사롭지 않다.
(북한 아이들의 트레이닝 복은 보통 상표가 없고, 그림이 그려져 있다.)
주체탑 아래서 찍은 마지막 컷이다.
아빠는 앞만 보고 무뚝뚝하게 걸었지만
딸은 우리 일행이 신기한지 연신 쳐다보았다.
아이의 스니커즈화가 돋보인다.
나이가 제법 들어보이는데 아빠 손을 잡고 있다.
저 정도 나이의 딸이 아빠 손을 잡고 길을 걷는 경우는, 남쪽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이다.
풍선껌을 불기 직전이라, 볼이 터질 것 같다. ㅋㅋ
평양력사박물관 앞에서 관람 순서를 기다리는 학생들이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했지만, 우리에게 양보해야 했다.
표정들이 다들 밝았다. (글쎄!)
우리가 그들에게 갖는 관심 이상의 관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만수대 언덕에서 찍었다.
친구와 사진을 보고 있는 모습을 몇 컷 찍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는데,
눈매가 너무 매서워서 그만 찍었다.
깨갱~~~
셔먼호 격침 기념비를 하교길의 아이가 올려다보고 있다.
나중에 이 아이는 자신이 수양버들 우거진 대동강변을 통해 통학했던 것이
소중한 추억이었음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북측도 일하는 부모 대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이를 보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할아버지와 산책 나온 아이의 모습이다.
자전거가 아이의 나이에 비해서 크다.
아마 오빠나 언니 것일 것 같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의 어린 시절 모습.
판단은 누리꾼들에게 맡기겠다.
(평양 사진 몇 개 올렸다고 빨갱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세상이라...
뭐라 말하기가 무섭다.)
김일성 체육관 앞에서 찍었다.
무채색 부모와 유채색 아이, 전형적인 평양의 모습이다.
오른쪽에 아이가 한 명 더 있었다.
역시 김일성 체육관 앞에서 찍었다.
어깨띠가 달려있어서 편해보였다.
단, 비공식적으로 저는 '블로거의 눈'으로 북을 보겠다고 했습니다.
평양으로 출발하면서 언론계 선배들에게 '나는 블로거 자격으로 갑니다'라고 말씀드렸고
북측 언론본부와 만나서도 시사IN 기자라고 소개하고 덧붙여'인터넷 블로그 <고재열의 독설닷컴> 운영자입니다' 라고 소개했습니다.
블로거의 눈으로 본 관찰기, '블로거가 본 평양'을 연재합니다. (절대 북한은 이렇지 않습니다.)
5일 동안 평양에서 보고 온 것들을 '블로거가 본 평양' 이라는 테마로 연재하려고 합니다.
평양에서 돌아와보니
'김정일 와병설'이 '김정일 사망설'로 바뀌는 등
북한이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라는 보도가 많더군요.
평양에서는 전혀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평양에 가 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호텔에만 있다가 북측에서 안내하는 일정을 따라다니면서
그에 대한 동태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가타부타 말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실 기자로서 ? 복잡한 심정으로 북에 갔습니다.
만약 우리들의 평양방문 기간에 '중대상황'이 생긴다면
기자로서? 천재일우의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니까요.
물론 그만큼 위험해질 수도 있겠지만요...)
어찌되었건 저는 추측과 억측 말고 제가 전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일단 가장 흥미있는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5일간 평양과 평양 주변에서 본 북한의 '얼짱'들입니다.
'미의 상품화'라고 타박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일단 관심 가는 이야기를 해야
다른 중요한 이야기들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실 것 같아서 결정한 일이니,
널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자 이제 편한 마음으로 사진 보시면서 평가해 보시죠.
누구를 북한 최고의 얼짱으로 꼽으시겠습니까?
남한의 미인들과 비교도 해보시면 더욱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얼짱'이라는 말을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얼굴 여왕'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ㅋㅋ)
남측 언론본부가 묵었던 곳은
대동강 양각도에 있는 양각도 호텔이었습니다.
호텔 밖을 벗어나도 방북단이 가게 되는 통상적인 곳 이외에는 갈 수가 없습니다.
매일 마주친 분들이 양각도 호텔의 '접대원' 동무들이었기 때문에 10명 중에 절반이 양각도 호텔 소속의 '접대원' 동무들입니다.
(북측에서는 식당이나 커피숍에서 일하는 사람을 '접대원'이라고 부릅니다.)
주) 밑에 댓글을 보니 '동무'라는 호칭에 대해서 말들이 많군요.
북한에서는 편하게 부를 때는 동무라고 하고
(우리로 치면 000씨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조금 높여서 부를 때는 '000선생'이라는 말을 씁니다.
손아래 사람을 부를 때는 그냥 누구누구야 하고 부르기도 하더군요.
제가 반문하겠습니다.
왜 '동무'라는 표현을 못 씁니까?
여기가 북한입니까? 이런 표현도 쓰지 못할만큼 우리 사회가 폐쇄적입니까?
기자가 얘기하는 호텔 접대원과 판매원입니다.라고 소개한 접대부들은 .
접대부나. 안내원이 되려면 철저한 사상 교육과 또 외모가 특출라야한다고
한다. 중국 심양 한 북한 식당 접대부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중국으로 파견된 접대부는
3년이 지나면 교체가 된다고 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상에 물이 들까봐
이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한다. 북한, 중국, 어느나라에 있는 식당 또는 호텔 기타
모든것은 북한 정부의 소유이다.개인것은 절대 없다. 모든것은 북한당국에서 조정한다.
(특별히 색출된 접대부들-미모)
러시아 부부가 찍은 북한 사진 감상
2006년 7월 27일 사진
엄마를 도와 리어카를 끌고 있는 이 소년은 한국나이로
15세 남한의 초등학생 4학년 수준의 신장이었다
마을에 설치된 전기 철조망
물동이를 메고가는 아낙네의 모습
물동이를 이고 가는 여인들
허가된 주민들의 모습이지만 뒤에는 안전 보위대가 지키고 있구나!
관광객들을 위해 꾸며놓은 방 (김일성, 김정일 사진...)
허가된 주민들의 모습이지만 뒤에는 안전 보위대가 지키고 있구나!
꼭 60년대의 남한 사진 (주의 복음이 저들에게 임하기를...
외국인들을 위한 휴대폰 전시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북한의 선박은 감시하에만 어업을 할수 있다. 뒤에 보이는 배가 감시하고 있다.
내외관광객들을 위한 선착장이지만 실제로 운영하는 경우는 없어 배에 녹이 슨 모습
북한의 농촌에는 이러한 폭탄방어대가 각각 설치되어 있다.
혹시 모를 폭탄의 투여에 대비하여 길 모퉁이에 세워진
돌방어막
북한사람들은 신장이 작다.같은 민족인 남한사람의 평균보다도 작은것 같았다
가이드가 북한의 가정집이라고 소개한 곳 실제로 북한의
가정집이 모두 저렇게 생긴건 아닌것 같았다.
가정집의 아이.가이드는 북한의 일반가정에선 아이들이 이런
옷차림으로 생활을 한다고 했다. 하나님! 저 어린것에게 주의
복음이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이드는 dvd 플레이어도 실행할수 있다고 하나, 우리가 보기엔
그냥 무용지물 같아보였다. 무슨 기계인지 모르겠다.
관광객을 위한 버스였는지 마을에 저런 버스가 있었지만
실제로 북한 일반사람들이 저런 버스를 이용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버스가 다니기에 도로사정도 여의치 않아보인다. (자동차 다니는 도로가 아니다)
불편한 도로사정때문에 전복된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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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이 땅에 주의 복음이 임하기를 원합니다. 한반도땅에 함께 살아 가지만 .....
주님! 이 북녘땅에 복음이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도 저 북녘땅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주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옵소서! 북녘땅에, 평양땅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 지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남북 기사 교류 합의서를 남북 언론인이 함께 읽고 있다. 오른쪽은 MBC 기자.
일본 NTV는 지난 3월 16일 사상 처음으로 북한의 공개처형 장면이 담긴 동영상을 방영하였다. 이 동영상은 함경북도 회령시 오봉리 유선노동지구 사형장에서 북한을 탈출한 죄 등을 적용하여 공개 처형을 집행하는 장면으로 알려졌다. |
북한 다시 공개 처형 시작
2008-10-05
북한은 김정일의 이상설과 노동당 창당일인 10월 10일을 앞두고 불안한 민심을 다잡기위해 또다시 공개처형을 시작했습니다. 평안북도 도보안국이 29일 오전 10시 30분 남신의주 4번째 다리에서 4명을 공개처형했다고 이 광경을 목격하고 북한에서 중국으로 나온 중국인 물류 기사가 자유 아시아 방송에 전했습니다.
지난 9월 18일 남신의주 연상동에 돈을 바꾸러 들어갔던 2명의 여자 용의자는 집주인이 돈을 세는 사이 흉기로 집주인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붙잡힌 여자 용의자 2명중 1명은 감옥에서 정신 질환을 일으켜 사형이 면제됐고 1명은 즉결처형에 처해졌습니다.
마약거래에 연루된 남자들은 마약 5~6kg을 밀수한 혐의로 처형됐다고 중국인 물류 기사는 전했습니다. 이들은 함흥에서 제조된 마약을 신의주를 통해 중국에 넘기려다 체포돼 공개 처형됐습니다.
평안도 보안국은 처형 실시전에 장마당과 건물등에 공개처형에 관한 공시를 붙이고, 북한 주민들을 가능한 많이 불러모아 이번 처형을 보도록 했다고 현지 주민들이 말한 것으로 이 중국인 기사는 설명했습니다. 평안도 도보안국이 대대적으로 알린 탓에 공개 처형장에는 주민 수천명이 모여 처형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시사IN 고재열 기자입니다. 독설닷컴
공식적으로는 방북 대표단의 일원 ? 이었지만,
비공식적으로 저는 '블로거의 눈'으로 북을 보고 와서 누리꾼에게 전하겠다고 했습니다.
평양으로 출발하면서 언론계 선배들에게 '나는 블로거 자격으로 갑니다'라고 말씀 드렸고
북측 언론본부와 만나서도 시사IN 기자라고 소개하고 덧붙여
'인터넷 블로그 <고재열의 독설닷컴> 운영자입니다' 라고 소개했습니다.
방북기간 동안 남측언론본부는 북측의 언어 표현에 관심이 많았다. MBC 논설위원인 최용익 새언론포럼 회장은 “북측은 김일성 김정일 두 사람에게 꼭 경어를 사용해야 해서 ‘김일성 수령께서와 김정일위원장께서와’라고 쓰고 있었다”라고 자신이 관찰한 것을 알려주기도 했다. 나는 북측에서 ‘희한하게’라는 말을 ‘희한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경지정리한 논 사진 설명이 ‘벌판을 희한하게 바꿨다’라고 달려 있어서 물어 보았더니 ‘멋지고 화려하게’라는 뜻이라고 안내원이 설명해 주었다.
이 사진의 설명에는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만경대일가분들과 함께 계시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라고 되어 있다. 표현의 주체가 어린 김정일이라는 것이 이채롭다.
북측의 말 중에서 남측언론본부 사람들을 가장 매료시킨 말은 ‘찌읍시다’와 ‘쭉냅시다’라는 말이었다. ‘남북이 찌읍시다’ ‘통일을 쭉냅시다’, 이 말이 남북 언론인들이 술자리에서 가장 자주 함께 외쳤던 말이다. 방북 기간 동안 건배할 때마다 북측 언론인뿐만 아니라 남측 언론인들도 이 말을 외치곤 했다.
‘찌읍시다’라는 말은 북한말 ‘찧다’가 변형된 것으로 ‘찧다’는 ‘축배를 들 때에 잔과 잔을 서로 마주 가져다 가볍게 부딪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쭉냅시다’라는 말은 ‘무슨 일의 끝을 보다’는 말로 잔을 부딪칠 때 이 말은 쓴다는 것은 ‘술잔을 비우자’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영어와 우리말을 섞은 괴상한 합성어에 이골이 나있던 남측 언론인들은 ‘찌읍시다’와 ‘쭉냅시다’에 열광했다. 이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건배’나 ‘원샷’ 대신 쓰며 즐거워했다. 술자리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상황에서도 이 말을 응용해서 사용했다.
남측 언론인들은 수차례 북측 언론인과 ‘찌었던’ 덕분에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10월20일, 남측언론본부는 6.15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회 언론분과위원회(이하 북측언론분과)와 기사교류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하고 서명했다. 그리고 함께 통일을 ‘쭉내자’고 결의했다.
남북 기사 교류 합의서를 남북 언론인이 함께 읽고 있다. 오른쪽은 MBC 기자.
기사 교류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만큼 남측 언론인들을 긴장하게 했던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관련 ‘중병설’이었다.
방북 당시 ‘중병설’을 넘어선 ‘사망설’까지 등장하는 상황이어서 언론인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만약 김정일 위원장에게 ‘중대 사태’가 발생할 경우 역사의 현장에 있게 되지만 현실적으로 취재할 수 있는
방법도 없고 기사를 송고할 수 있는 방법도 없어서 자칫 ‘역사의 현장에선 바보’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남측 언론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측언론분과 대표단에게 평양시 안팎의 취재를 허가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묵묵부답이었다.
북측에서 자랑하려고 하는 내용이라도 취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역시 거절했다. 사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북측은 남측언론본부에 화가 나 있었다.
남측언론본부는 국내 여론을 의식해 대부분의 방북자들이 평양에 가면 맨 처음 가는 김일성 동상이 있는 만수대 언덕을 방문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남측언론본부의 결의가 마땅치 않았는지 북측언론분과는 일정을 가지고 매일 신경전을 벌였다. 그러나 서로 ‘찌으며’ 결국에는
합의서를 ‘쭉낼’ 수 있었다.
김정일 위원장 ‘중병설’과 관련해 온갖 추측과 억측이 난무하고 있다. 남측 언론이 제대로 북과 ‘찌으려고’ 하지 않고 건너들은 이야기로만 이런 보도를
계속 한다면 통일을 ‘쭉내는’ 것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오늘도 저 북녘땅 한 그늘아래 저 어린 자녀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땅이여! 이 민족이여! 일어나소서!
오늘도 먹을것이 없어 처참히 죽어가는 자녀들을 보소서!
오늘 죽어가는 저 어린것들을 보면서,,, 오늘 죽어가는 저 어린것들을 보면서...
한반도, 한반도땅은 분명히 한 핏줄로 내려온 한 민족이다.
그런데 왜? 왜? 북녘땅에 죽어가는 한영혼을, 아니 이 민족을 바라보지 못합니까?
민족이여! 일어나 한 그늘아래
죽어가는 어린 자녀들을 돌아 보소서! 하나님이여! 이제 제발 이 민족을 살피소서!
저 어린것들과 나의 생명을 맞 바꾸어 저 북녘땅에 웃음꽃이, 저 북녘땅에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이 임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민족이여! 일어나 빛을 발하라! 민족이여 일어나 한 그늘 아래있는
저 어린것들을 바라보며 두손들어 하늘의 하나님께 부르짖어보라!
살아계신 하나님은 이 민족이 하나가 되어 저 북녘땅을 바라보며 부르짖는 기도를 외면치
않으실것이다.
민족이여! 일어나라! 민족이여! 일어나라! 이제 하나님의 때가 가까왔음을
인식하라. 나 혼자만의 외침이 아닐것이다. 지금도 누군가 저 북녘땅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며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을 것이다.
민족이여! 일어나 한 그늘아래
아파하며 고통하는 우리의 자녀들의 울부짖음의 소리를 들어보라!
이제 이 민족이 함께 아파해야한다.
지금 우리는 두 눈으로 분명히 보지 않았는가?
배가 고파 땅에 떨어진 음식 찌꺼기를 찾아 줍는 저 어린것들을 보지 않았는가?
민족이여! 이제 잠에서 깨어나 북녘땅의 아픔을 바라보라! 민족이여! 일어나라!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세아 6장 1절)
여호와 하나님께서 금년 2009년 나에게 뿐만이 아니라 이 민족에게 주신말씀이다.
이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Let My People Go-KCC theme song
북한 어린아이의 모습들을 동영상으로 올려드립니다.
(클릭) http://www.youtube.com/watch?v=UEU__QUGNOA&eurl=http://blog.daum.net/_hdn/blank_article.html
북한이 죽어가고 있어요! 의약품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지금, 지금,
지금 의약품을 보내야합니다. 지금, 눈물로 호소합니다.
이 민족에게 처음 복음이 들어온곳이 평양입니다. 평양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평양에 복음화 운동"을 위해 기도바랍니다. 지금 평양 복음화 운동을 위해 몸 바쳐오신 80세된 "김영철 목사님" 그와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목사님과 첫 만남은 2007년 9월쯤 나성주님의교회 금요 기도모임이었다.(첫번째 만남) 10개월이 지나서 우리는 LA의 한 켄터키 프라이즈 치킨집에서 우연히 만났다. (두번째 만남) 하나님께서는 2009년 3월 12일 LA 한남 마켓앞에서 또 만나게 하셨습니다. (세번째 만남)
나의 집은 토렌스입니다. LA에서 차로 20분거리입니다. 목사님과 세번째 만남은 3월 12일, LA에 들렸다가 집으로 가야하는데 무엇인가 이끌리듯이 LA를 방황하다 한남 마켓에 들려 전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서 들렸는데 그곳에 목사님께서 계셨습니다. 그동안 저에게 일어났던일들, 또 간증을 들으시면서 눈물을 글썽이시면서 계속 말씀 하십니다. "때가 가까왔다"는 것입니다. (이상 3월 13일 글을 올림)
우연히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속에서의 만남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북녘땅을 바라보며 함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북녘땅을 향한 애절함의 이야기를 들어보시더니 이야기 합니다. 이제 때가 가까온것 같다고 하시면서 계속 이야기합니다. 온 세계가 보는 가운데 온 세계가 깜짝 놀라는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야기 합니다. 김정일과 친분이 있어 평양에 복음화 운동을 권하지만 김정일이는 자기의 세력에 문제가 있을까 하고 허락를 안하고 있다합니다. 공식적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김정일이 정권을 잡고 있을때 평양복음화운동이 평양에서 일어나야합니다.
지금도 노인, 김영철 목사님께서는 북녘땅에 백성들의 의약품을 지원키위해 교회들을 돌아보며 헌금을 모집 하고 있습니다.
왜? 저는 안타까왔습니다. 북한에 필요한 의약품 1 콘테이너를 수집합니다. 지원은 미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먼저 미국 정부에 의약품을 수집하는데 필요한 인건비 $ 25.000불 (수집하는 인건비)을 선수금으로 주어야 구호물자들이 수집이 시작됩니다.
한 콘테이너 수집하는데 1-2달이 걸리게 됩니다. 구호물자(의약품) 들은 대략 100만불 이상입니다. 수집된 의약품은 미국 LA 롱비치 항에 도착을 하게되고 도착하기전 일주일전 미 정부로부터 연락이 옵니다. 사랑의 의약품 콘테이너는 한국 인천항을 거쳐 북한 남포항으로 가게 됩니다. 배 운임비가 8000불이 들게 됩니다.
도착하는 즉시 배로 북한으로 보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콘테이너가 롱비치 항 창고에 묶여있어야 하기때문에 그 창고세를 내야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함께 해야합니다. 80세, 연로한 나이지만 지금도 목사님은 이를 위해 교회를 다니며 헌금을 모으고 계십니다. 북녘땅의 백성들을 바라보며 한 노인이 지금도 교회를 다니며 헌금을 모집하며 음직이고 있습니다. 지금은 북한뿐 아니라 의약품이 필요한 나라로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3만 5천불이면 북녘땅, 또 필요한 나라로 ........ 미 정부 이름, 한국 정부의 이름도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과 저희들의 기도와 사랑의 후원으로....... 오랜 세월동안 한 노인의 순수한 북녘땅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어받아 부족한 종이지만 목사님과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 일본에서 20년 목회, 미국에서 30년 목회를하시며 북녘땅을 향한 마음을 계속 이어져 온 목사님, 이제 그의 마음을 이어받아 저 북녘땅에 의약품을 전달하는것은 여러분과 저의 몫이 되었으면합니다.
그리고 그의 소원이며 우리들의 소원인 평양 복음화 운동을 위해 기도를 바랍니다. 김정일이 이를 수락할 수 있도록, 김정일이 살아 있을때 북한 평양 복음화운동이 일어나야합니다. 이렇게 한 노인의 애써하는 마음을 담아 글로 올려 드립니다. 여러분의 헌금을 기다리겠습니다. 지금 미 정부에 $ 25.000을 주게되면 수집이 시작되는데.......
하나님 이 땅 고쳐주소서! 이 땅 고쳐주소서! 상한 이 땅 회복하여 주소서
이 민족이 여호와의 민족입니다. 이 민족 여호와를 바라보며 기도하나이다.
주의 영광이 이 땅위에 임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사 60: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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